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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준 Oct 12. 2021

익명성을 보호하는 것

   시점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유사회사에 건의함이라는 것이 생겼다. 약간 "우리 회사는 이런 것도 합니다!"라고 내세울 수 있으면서도 들어주기 싫은 건의는 안 들어주면 그뿐인, 만만한 대상이라고 생각이 든다. 실제로도 이것저것 건의를 사람들이 해도 대부분 번역기를 돌리면 "싫어"로 귀결되는 어용 그 자체의 도구이기에, 나는 한 번도 종이를 집어넣은 적이 없다.


   이렇게 신경을 좀 안 쓰던 중, 분기마다 건의함과 더불어 사용자 측과 사용인 측의 협의회라고 쓰고 통보 쇼가 벌어지는 정기 모임이 있는데 이때 건의함에 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가 있었는지 공유가 된다. 그런데 지난 분기(7~9월)에는 일단 건의 자체가 엄청 많았는지 내용이 엄청 많았고, 배치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맨 아래 건의가 너무 인상 깊어서 기억에 박히고 말았다.


   비유를 하기엔 그렇고, 그저 일러바치는 내용이었다. "이러이러한 건 룰 위반이니, 징계를 내려라." 건의랍시고 징계를 내리라니. 내부 고발이라기엔 중앙에서 전체 공지를 제때 안 한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전체 결재라인으로는 확정된 사항이라서, 그저 최소한의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징계를 내리라는 막장 지르기였다(주위에 물어봤으면 대답을 해줬을 것 같지만, 그 자는 나보다도 유사회사를 몇 년은 더 다녔지만, 우호적인 임직원이 단 하나도 없다). 회의에서 이런 건의가 있었다는 걸 듣고 나는 육성으로 "꼬우면 네가 사장해ㅋ"라고 빈정거림이 나와버렸다(나는 이 유사회사에서 내로라하는 광인으로 유명해서, 제지는 받지 않았다).


   웃긴 건 익명성이라 하는 것이 만능 장미칼이 아니니까, 수준이 낮으면 "티가 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워낙에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다 보니 인구에 회자되긴 하지만, 대체 누가 썼는가에 대해 모든 사람이 딱 한 명을 지목하고 있다. 익명성에 숨었지만 행태나 언변, 대인 관계 등을 종합해봤을 때 유력 후보 조차 아니고 단독 출마에 즉시 당선되어버린 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익명성의 악용 후에는 후폭풍이 일고 있는데, 익명으로 운영되던 건의함에 실명 기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에 명분이 생겨버린 것이다. 게다가 저것 말고도 계속 이상한 시비를 걸고 있어서, 위에 이야기한 "들어주기 싫은 건의는 무시한다"는 방침에 "계속 건의한다"는 방침을 고른 자가 있는데 이 자도 저 일름보와 동일 인물이라는 우세 의견은 있으나 저 징계 건의만큼 단정 짓지는 못한 상황이다. 자꾸 똑같은 건의를 앵무새처럼 하니 불러다가 설명해주겠다는 식의 전개가 돼서, 익명성이 훼손되게 생겼다.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익명성은 중요하고, 내부고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의 저 지르기는 익명성을 악용했다고 생각한다. 저 내용이 익명이 아니었다면, 그 자는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웃기게도 익명이지만 익명이 아니게 될 만큼, 행실이 전설적이라서 자신이 대놓고 비난을 받는 일은 피하려고 하지만 인망이 아예 없어서 그렇다. 사실상 내부고발도 아니고 그저 "시비"를 거는 것뿐이니 익명성에 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긴 하다. 당당하게 내부고발을 하는 사람과, 당당하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엄연히 다르지 않겠는가.


   스스로도 "시비"가 아닌 "내부고발"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성격은 못 되고 그 누구라도 아주 기본적인 팩트 체크(그저 주위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봤으면 할 수 없는 건의 수준이었다. 이것이 "용의자는 유사회사 내에서 우호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정황 증거가 되었다)만 제대로 했다면 절대 걸 수 없는 승부였다. 타짜에서 고니도 말하지 않는가?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라고. 


   비단 저 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익명성의 세계에는 그것을 제대로 보호하고 활용하는 자들도 있고, 악용하는 자들도 있다. 사람이 매우 많으니 다양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래도 부디 우리 모두 익명성을 소중히 쓰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익명성이 보장되더라도 수준 낮은 비난이나 날조를 해서 무책임하게 오용할 것이 아니라, 아껴서 쓰고 보호하면서 써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익명성을 보호하지 않으면, 언젠가 인터넷 실명제라든지 그런 것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익명성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제한되어 버릴 수 있고 이것은 사회를 위해서도 지양되어야 할 방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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