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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준 Nov 05. 2021

회의실 잡아놓고 내 뒷담을 했네

   잡역부를 하는 신세다만, 두목의 나라에서 쌍스럽게 자라서 그런지 나는 절대 이 회사에서 호락호락한 편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사장=두목한테도 덤빔). 멍청이들하고 같이 일을 하자면 원리원칙주의가 제일 효율이 좋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원칙을 지키도록 엄격-근엄-진지한 자세를 취한다. 적이 많든 적든 관심은 없다. 적어도 기분의 좋고 나쁨에 따라서 jiral을 한 적은 없다. jiral은 언제나 원칙에 의거해서 진행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적이야 많다. 게다가 잡역을 하다 보니 공교롭게 내가 협업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지라 갈등의 대상도 많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은 곳에서 내 정보력과 눈치가 나쁘진 않기 때문에 물밑에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었다.


   우습게도 최근 가장 일에 당사자인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들끼리 회의를 잡아서 뒷담 잔치를 벌인 것을 나는 내 정보력과 눈치로 바로 알았다. 갈등자들의 어젠다와 입장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웃긴 것은 정작 회의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도 앉혀 놓은 주제에 가장 할 말이 많은 나는 정작 배제됐다는 점이다.


   솔직히 회의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내용이다. 내가 진행하는 잡역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넘어가고,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 끼어 있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아예 발을 빼고자 하는 것을 관계자 전원이 주장했다. 내가 느끼기에 내가 하는 일이 10을 전체로 했을 때 8이고 저들이 하는 게 2 정도면, 이 2를 하는 것조차도 왜 우리가 해야 하냐(결국 남아 있는 2를 나보고 다 가져가라고 하고 싶은 것)를 주장한 상황이다. 더불어 내가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점도 불만요소에 들어간 듯하다.


   "R&R(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것(뒷담 회의에서의 내 적들의 명분)"이 언제나 싸움에서 승리하는, 전가의 보도인 건 아니다. 만약 애매한 일(일을 하다 보면 담당 영역이 확실한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훨씬 많다)이 생겼을 때는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하고 나서서 돕는다면 아마 저 회의가 개최되었을 이유가 없다. 그 점이 매우 끔찍한 부분이다.


   R&R 명확론에 대해서 나도 달고 있는 직무 자체로만 따졌을 때는 8을 하는 것도 많은, 나와 무관계할 수도 있는 영역이다. 어차피 허접한 회사에서는 업무 분장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귀속되어버리는 일이 흔하기에 내 직무보다는 내게 귀속된 일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웃기게도 R&R을 주장하기에 내가 맡은 "잡역"은 내가 달고 있는 "직무"랑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하고 있느냐 하면, 생각보다 내가 역설적으로 이 유사회사의 충신이라서 그런 건가 싶다. 나도 쟤네들처럼 R&R 명확론으로 징징 거릴 수도 있지 않나 싶긴 한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유사회사에서는 결국 저 일을 한 번 하게 되면 종속되어버리는 일이 흔하고(무책임한 자들이 많은 회사에서 어떤 비정기적인 일을 누가 처리한 적이 있느냐는 전례는 꽤나 피곤한 단서가 된다. 그러니까 서로 안 하려고 드는 것이다) 한번 종속된 일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증빙 제출 등 귀찮은 일이 많다. 그렇다. 나는 "귀찮아서" 사실 R&R 명확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즉, 내가 이 일을 더 이상 안 하기 위해서는 내가 증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냥 계속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 눈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잡역=내 직무라서라는 도식이 들어선 듯하다.


   그래도 저 2할은 생각보다 귀찮고 거슬리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친절하게 해주고 싶지 않다. 8할은 내가 해줄 마음이 약간은 있고 지금 와서 덜어내기엔 귀찮고("내 일이 아니다"라는 입증을 내가 해야 하니까) 덜어낸다고 해도 결국 R&R 명확론에 의하면 원래는 담당자가 따로 한 명 있어야 되는 일이라서. 지금 문제에서 R&R 명확론을 주장하는 놈들의 목적은 결국 "자기들이 2할을 안 했으면 한다(속되게 표현해서 "나만 아니면 돼" 정신이다)"는 것이고 R&R 명확론을 입맛 좋게 써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진짜 직무만으로 봤을 땐 그 2할을 나한테 주는 건 원천적으로 난센스인데 자꾸 나를 그 직무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런데 내 메인 업무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담당자를 세우자고 하기엔 피곤하니까 자꾸 이 일이 내 일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으니, 공세에 처하긴 한 상황이다.


   웃기게도 저 뒷담 회의에서는 결국 공청회 정도만 진행이 된 것이고(두목이 부서장들끼리 결투를 벌이라고 했는데 정작 나타나지 않음. 그렇게 1시간을 넘게 서로 시간을 버린 끝에), 결국 담판은 윗선에서 한다는 듯하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간에, 만약 2할이 내게 넘어오게 된다면 몇 가지 핵심적 서비스(내가 절대 해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자 저것들이 완전히 편해질 수 없게 하는 부분)는 안 할 거라고 못은 박을 생각이다.


   더욱 웃기게도 역설적으로 반역자인 내가 충신 같아 보이는 현 상황이 매우 역겹다. 아마 두목이 바라는 대로 나는 하고 있다. 내가 딱 내게 주어진 직무에 맞는 일이 아니어도 뭐 지금 확실한 담당자가 없으니(인원 부족)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양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내 일이 아님에도 8할을 하고 있는데 2할을 하는 것들이 이거 다 니 일이잖아~하는 꼴이라니. 제대로 R&R 명확론을 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이다. 내 직무랑 내가 지금 하는 8할, 그리고 지들이 하기 싫어하는 2할이 연동이 되지 않는데 무슨. 차라리 새로 사람을 뽑자라고 하든지(정론이겠지만 유사회사에서 정론은 공염불이다). 기대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정말 내년에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 한 번도 이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 서로 도움을 요청하고 돕고, 또 도움을 받았으면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보면서 같이 험한 이윤창출(여기는 회사니까)을 달성하고 싶다. 그런데 언제나 회의랍시고 하는 것이 서로 떠넘기기 위한 대환장 파티라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주말인데 놀기는 글렀다. 이 분노로 이직 준비를 해야 된다. 요즘은 자꾸 집에만 가면 유사회사에 대한 모든 걸 깔끔하게 잊어버려서 문제인데(분노라는 에너지원이 주말마다 숨김 처리되어버리는 현상) 이번 주말에는 잘 써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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