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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준 Dec 03. 2021

저주는 누구를 죽이는가

   직장인을 하다 보면, 언제나 영혼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것은 직장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분노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고 나 자신도 통제가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기에, 그 분노를 이어서 대상에 대해 저주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이제는 의식적으로 저주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쉽지는 않지만.


   많은 창작물을 보면, 그리고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남을 저주하는 행위는 인간과 매우 친숙한 주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물이든 현실이든 저주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저주를 통해서 저주받는 대상을 해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 없다. 그만큼 간절하니 창작물의 소재가 되어 재미도 주고 카타르시스도 주고 하겠지만, 현실에 없다는 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외국 속담에 "남을 저주하려면 무덤을 2개 파라"는 것이 있다. 남을 저주하는 행위를 할 것이면, 자신도 충분한 각오를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서 가볍게 생각해봤듯이 어차피 남을 저주해도 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 2개 파는 경우는 저주가 효과가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니, 말을 좀 더 현실적으로 고쳐보자면 "남을 저주하려면 자신의 무덤을 파둬라"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스친다. 원수나 타인을 간접흡연을 통해서 질병에 걸리게 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하고. 간접흡연의 해악도 거대하지만, 직접흡연만큼 몸에 나쁠리는 없다. 간접흡연으로 타인을 병들게 할 만큼 피웠다면, 직접흡연을 해온 자의 몸은 더 심각한 상태가 아닐까. 결국 먼길을 돌아 돌아 행하는 자해이며 극단적 선택일 뿐이다.


   저주는 우리의 적은 결코 죽이지 못하지만, 의도와는 정반대로 우리를 확실히 죽이는 맹독이라고 생각한다. 저주를 하는 것은 영혼에 자해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주를 하는 대신 "건설적인 복수"를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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