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독준 Dec 01. 2021

위대하고도 부끄러운 자를 생각하며

   100년 전쯤에 짧은 생을 살다 간 시인이 있다. 그 시인은 후예인 우리에게 있어 위대한 존재로 기억되며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그 시인은 시대와 현실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도 부끄럽다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마음은 진실되었고 많은 성찰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부끄러워한 것에 대해 결코 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부끄러워한 마음은 너무 크고 위대했다.


   의기양양이라는 말은 뜻만 떼어놓고 보면 좋지만, 유래가 된 이야기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옛날 어느 나라의 명재상을 모시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 마부의 아내가 마부가 너무나도 의기양양한 것을 보더니 마부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다. 놀란 마부가 이유를 물으니 아내는 말하길 한낱 마부에 지나지 않는 자가 재상보다 잘났다며 뽐내는 모양을 보니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그 마부는 아내의 충고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태도를 바로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옛 시인도, 옛 재상도 겸허함에서 위대함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겸허하기에 부끄러우며, 겸허하기에 나라의 재상이었지만 평범한 마부보다도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과연 재능이나 마음의 그릇의 크기가 부족했을까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시인도, 재상도 다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다. 왠지 모르게 글을 쓰다 보면 직접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들 알 테니까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듯하다.


   위대한 자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출중함에도 겸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은 어떠하고, 요즘 세상은, 요즘 사람들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면 씁쓸해진다. 대부분 목소리 크고 펄쩍펄쩍 날뛰는 철면피들이 주목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지금 세상은 "정보의 홍수"라고 칭해진 것이 한참 되었으니까.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성찰을 덮어놓은 의기양양함이 필수인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은 부끄러움도, 겸허함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애초에 나 잘났다 하고 자기 홍보를 해야 하니 그런 심층적인 검토를 할 생각을 하는 순간 정보의 홍수에 휘말려서 묻힐 터이다. 그래도 결국 밑천이 드러나는 일이 허다하다. 과거의 악행이나 아둔한 언행들은 요즘 세상에는 "박제"라는 이름으로 아주 잘 기록되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기억에 나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전가의 보도가 아니며 건망증이 심하다는 조롱을 받을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써놓았지만 나 자신이야말로 더 겸허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대상이다. 내가 브런치에 써놓는 대부분의 말이나 생각은 나 자신을 위해서 써놓는 것이 절반을 넘어간다. 자신을 성찰하기 위함이고, 내 코가 석자다. 시대가 어떻든, 내가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을 리도 없고 할 수 있어도 그런 것은 우주적인 금기에 속할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제대로 이끌면 그만이다. 


   위대한 사람은 부끄럽고, 대다수의 범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도 부끄러움을 알아야 위대한 사람들의 그림자라도 밟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집착: 인생의 향신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