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독준 Mar 10. 2023

죄송한 "척" 하기(사회생활에서)

헛짓거리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의 일이다. 물가가 오르다 보니 배식형 식당의 식권 값도 조만간 오를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측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매우 기습적인 형태였다. 안내의 날짜는 그 주의 목요일이었다지만 사실 그 목요일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다음 날인 금요일에 식권 투입함 앞에 걸리적거리게 안내판을 배치하여 두니 도저히 못 알아챌 수가 없었다. 일정이 더욱 가관이었다. 그 주말을 보낸 직후부터 적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금요일에 기습적으로 통보하고 3일 뒤부터 바로 적용하겠다니 전혀 좋게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안내 내용도 제목에 적은 것과 같은 면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용과 뉘앙스는 사진은 찍지 않았고 대충 외워왔다. 1. 물가 급등으로 부득이하게 올리게 되었다. 2. 너른 양해를 바란다. 3. 앞으로도 많은 이용을 해달라. 큰 틀은 이것이었다. 사회인의 입장에서 이 안내문은 0점짜리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이유는 기한 자체가 글러먹었다. 사실상 금요일에 알리고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적용하겠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전혀 존중이 없는 일처리이기 때문이다. 내 옛날 발행글 중에 "업무 요청은 최대한 기한을 넉넉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있는데 그것에 해당된다. 직접 지갑을 열어 식권을 사야 되는 사람들에게 금요일에 이런 불쾌한 기억과 경험을 주말 간에 심어주는 것은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백해무익한 일이다. 이번 일로 그곳의 신용도가 많이 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안내에는 죄송한 "척"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죄송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 익히 알겠고, 이런 일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사실 이는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니기도 하다. 물가가 급등하고 인건비가 오르고 뉴스에서 그렇게 나팔을 불며 실제로도 그렇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객이나 협업자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격이다.


- 물가 급등 및 인건비 상승으로 부득이하게 식대를 인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물가 급등 및 인건비 상승으로 부득이하게 식대를 인상하게 되었습니다. 너른 양해 바랍니다.


   위의 두 문장은 엄연히 다르다. 첫 번째 문장을 보고 사람들이 혀는 좀 차겠지만 양해를 할 마음이 들 것이다. 두 번째 문장을 보고 정말 양해를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도리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뭐가 이렇게 당당해서 나보고 양해를 하라고 해?"


   이러한 경우 표현의 진정성은 직접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포인트이다.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거듭 강조하지만 속으로(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사회적으로 정형화되고도 무난한 표현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죄송한 척 하기는 그중 하나의 상용적 표현 중 하나다.


   저 안내문을 보니 두목의 외조카를 떠올리게 되어서 사실 쓴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 자기 일을 전혀 검토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정정 메일을 매번 받는데 주로 쓰는 표현이 저 식당의 안내와 비슷하다. 그래서 내 인식 속에는 "일은 엉망진창으로 하지만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개념도 없이 자신은 언제나 당당하다는 아주 뻔뻔한 친구" 정도로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으로 무난한 표현을 쓰는 것은 결코 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직접적인 표현을 그렇게 했더라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감각이라는 것이 있으면 어차피 "의례적인" 주고받기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의례적일지라도 경우에 따라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사회에서는 필요하다. "쓸 줄 알지만 쓰지 않는 것"과 "쓸 줄 몰라서 못 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조직 문화에 대한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