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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준 Apr 28. 2021

모두와 친해질 필요는 없다

애초에 불가능하기도 하고

 전에 가업을 이어받아서, 통념적인 기업체에서의 경험은 없는 대학 동기가 "회사는 어떤 느낌이냐"라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싫은 사람들과 반복되는 조별 과제를 해야 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는데, 애드리브이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봐도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든 사회든 학교든 그 어디가 되었든 모두가 서로 위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고 준 만큼 받는다면 세상은 참 살기 좋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다른 인간이 없으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살아가기 힘들지만, 그 다른 인간들에 의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요성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모두가 선망하는 급여나 복지, 지위가 있다고 해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극심하다면 타인이 부러워할 그런 위치라고 해도 사람들은 떠나가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가 중요하다는 하나의 사례가 되어준다.


 좁든 넓든 어딘가에 속해서 활동을 하다 보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냥 모두가 기피하는 사람도 있고, 기타 여러 범주의 사람이 존재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고민을 할 수도 있다. 교류를 하는 사람들과 두루 좋게 지내면 최고 아닐까 하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사회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니 이 또한 객관적인 것은 아니겠다.


 하지만 내 경험 상 매우 개인주의인 것을 넘어서 이기심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는 데에는 득달같으면서도 반대로 내어줘야 할 때는 귀찮아하고 생색을 내서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곤 했다. 사회생활 처음에는 이런 경우에도 최대한 친절하게 응대하려고 했지만, 저런 사람들은 영화 대사처럼, "호의가 반복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걸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그 사람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좋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99번을 요구에 부응해도 1번 거부하면 사람들을 선동해서 매장시키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100번을 거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또한 저런 습성을 가진 자들은 결국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하기에 선동의 효과가 저조했다. 편 가르기도 재주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많은 사람을 만나본 건 아니지만, 참 저 사람처럼 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사람이 있다. 나이는 나보다 8살 많았고 직급은 나보다 높았지만 타 부서였다. 내게 불운하게도 그 자가 요청하는 일을 내가 처리해줘야 하는 업무 흐름이었는데, 군대식 사고방식에 찌들고 천박한 사람이라서 싫었다. 이 자는 모든 일을 적당히 던지면 내가 다 알아서 해주길 바랬고 대접받는 걸 당연하다고 주장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주 싸웠지만 그렇게 되기 좀 전에 이런 내 노고(?)에 대한 보상이랍시고 이야기했던 것이 걸작이어서 기억이 난다. "나중에 이 업계에서 이직을 하면 자기가 좋게 말해주겠다"라고 말이다.


 일단 자기가 그저 나보다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다는 것 하나 가지고 자기가 이직하거나 퇴사하기 전까지 떠받들리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도 더러웠고, 제안하는 보상이라는 게 자기가 뭐라도 된다고 남에게 추천을 해주네 마네 하는 것을 운운하는 것이 같잖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나의 인식체계에서 지위가 더 아래로 추락한 것은 덤이다.


 능력에 비해 대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자는 2~3년 정도만에 회사를 떠났고 나는 바로 그자의 휴대전화 번호를 차단했다. 어쩌다가 자동 거절된 이력이 뜨면 매우 기분이 나쁘며, 이 주위에 와서 주차 등록이나 해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걸 달라고 할 게 뻔한 인간이었으니 용건이 궁금하진 않았다.


 멋 모르던 초년생 때 무리한 요구에 데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 짜증이 나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꼭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몇 명 더 있었고 나는 그들과 싸우며 지냈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두와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란 싹수가 보이면 빨리 싸우고 담을 쌓는 게 속이 편하다. 결국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등돌릴 자들이라면, 요구를 빠른 시일부터 빨리 들어주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내가 언급한대로 투쟁의 대상이 인간관계에 무능한 자들이라면 싸워도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적지만, 만약 편 가르기에 도가 튼 자들에게 자신이 이용당하는 상황이나 위기라면, 최대한 빨리 그 곳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럴 땐 정말 빠른 이직이나 생계 방어 수단을 고려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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