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호박 Jul 16. 2024

사과님과 함께한 사흘

2024-07-13(토)~15(월)

사실 이번 유배에 적극적으로 면회객(?)을 모집했다. 본진의 공연이 단초가 되어 시작된 유배인 만큼 최우선순위는 본진의 부산 공연 올공하는 것이었고, 그다음 우선순위는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김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부산에 내려오기 전, 셀프유배 소식을 친한 친구들에게 전할 때마다 주된 반응 중 하나가 "우와, 그렇게 오래 내려가 있다고? 여름휴가 기간인데 나도 너 있는 동안 겸사겸사 부산이나 갈까?"였다.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4주 가까운 시간 동안 내내 혼자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를 보러 누군가가 와준다면 그 사람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박비야 어차피 26주 적금으로 해결되었겠다, 내가 부산에 있는 김에 놀러 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숙박비를 아끼는 대신 맛난 밥을 내게 사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담은 노션 페이지를 만들어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첫 면회객은 바로 나의 덕메, 사과님이었다. 사과님은 대외활동을 통해 만난 사이인데, 우연히 같은 팀(크레즐)을 응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여러 공연을 함께 다니면서 1년 새에 정말 많이 가까워졌다. (언젠가 또 차근차근 써나갈 덕질유랑기의 8할이 사과님이 아닐지...) 이번에도 내가 나의 본진이자 팀의 리더인 규형 배우의 공연을 보러 부산에 간다고 하니 선뜻 내려오겠다고 한 것이다. 사실 사과님은 이직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은 상황이라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주말에 내려올 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멋지게, 이직한 지 한 달 안에 회사에서 좋은 성과를 내서 포상 휴가를 얻어내서 토일월 2박 3일 간 부산에 오게 되었다.


사과님과 함께한 2박 3일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첫날은 나도 낮 공연이 있고, 사과님도 내려오는 시간이 있어서 저녁에야 만났다. 저녁을 먹고, 바에서 가볍게 술을 한 잔 하면서 나는 낮에 본 공연 이야기를, 사과님은 그 사이에 부산에서 만난 지인분과의 이야기를 했다.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을 팔로우 업하는 시간이었다.


본격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이튿날부터였다. 전날 사과님이 지인분에게 추천받은 카페에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아늑하고 세심한 배려로 가득한 공간에서 건강한 샌드위치와 요거트를 먹었다. 사과님과 브런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뼛속까지 문과생이자 소셜섹터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사과님은 소셜섹터에서 나와 만나기는 했지만 공대 출신에 IT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사람이다. 사과님과 나는 자라온 환경을 비롯한 백그라운드나 현재 하고 있는 일도 다르고, 그렇기에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생각하는 방식도 다소 다르다. 그럼에도 서로를 정말 좋아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상호 인지하고 있고, 그로 인해 형성된 다정한 안전함이 우리 사이에 폭신하게 놓여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진 다름을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 내놓게 된다. 그것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배움이 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한 영감이 되기도 하는 것이 정말 좋다. 최근 AI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는 사과님에게 클로드를 추천받았다. 새로운 것이라면 사람이든 기술이든 낯을 가리고 다가서는 데 꽤나 어려움을 느끼는 나지만, 사과님의 친절한 가이드에 따라 나도 조금씩 활용해 보기로 결심했다. 사과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가진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나를 바라보며 마음이 말랑몽글해지는 것이 좋았다.


브런치를 먹고는 함께 <디어 에반 핸슨>을 봤다. 1열에 앉아서 본진을 가까이 본 데다가 감정이 제대로 전이가 되어 오열하느라 진이 빠진 나와 18열에 앉아서 다소 거리감이 있는 데다가 앞자리에 키도 덩치도 큰 남성분이 앉는 바람에 요리조리 틈새를 찾아 공연을 보느라 목이 빠질 뻔한 사과님은 공연이 끝나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달다구리 한 케이크를 사 와서 잠시 쉼과 당을 함께 충전했다. 기력을 충전하고 나서 광안리로 향했다. 맛있는 저녁도 먹고 광안대교도 봤다. 술을 마신 김에 조금 더 사적인 혹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과음했다.


마지막 날인 월요일 아침에 그래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침대에 소파에 늘어져서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사과님이 복날이니까 삼계탕을 먹으러 가자고, 그러고 나서 물놀이도 하러 가자고 해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부지런히 예약을 한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약 30분 정도를 기다린 후에야 삼계탕을 먹을 수 있었다. 웨이팅 할 때 우리를 누락한 이슈가 있기는 했지만, 삼계탕의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과 정갈한 상차림이 모든 것을 용서하게 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광안리로 가서 2시간 정도 압축적으로 물놀이를 했다. 물놀이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사과님보다 더욱 신난 나는 물 만난 물살이가 되어 튜브 위에 사과님을 태우고 모터보트 같은 발차기를 와다다다 해댔다. 선베드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광안대교를 바라보기도 했는데 월요일 오후에 이렇게 평온해도 된다는 사실은 포상 휴가를 받아 쉬고 있는 직장인 사과님뿐만 아니라 무엇에도 매여있지 않은 나에게도 흡족함을 주었다.


기차 시간 직전까지 꽉꽉 알차게 일정을 소화하고, 사과님은 아슬아슬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사과님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깔깔깔 웃고, 토도도독 각자 할 일을 하면서 내는 소리로 가득했던 부산집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한 세계가 왔다 갔구나' 싶었다.


사과님이 오기 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사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더욱 선명해진 생각이 있다. 유배 기간에 누군가가 면회를 온다면, 그 면회객의 방식으로 여행하고 살아가기로. 그게 평소 나의 방식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예정된 면회객은 3명. 각각의 면회객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다채로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물론 그전까지 일단 나와의 시간은 나만의 방식으로 보낼 거고!


이전 09화 여름방학의 나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