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2(금)
전날 SUP을 가열차게 타고 광안리에서 바다를 꽤나 오래 바라보다가 돌아와 집 근처 바에서 책 읽으며 칵테일을 마셨더니 완전 취기가 제대로 올라왔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조금 쉬어가야지...' 하면서 잠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게 좋았다. 언제 장마가 시작될지 모르는데 이 날씨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고는 슬슬 집밖으로 나섰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향한 곳은 달맞이길. 두잇두잇줌 멤버인 은님께 김성종추리문학관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그게 달맞이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간 것이다. 사실 달맞이길은 산책도 산책이지만 드라이브를 주로 많이 간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뚜벅이인 나는 부산 2호선의 종착역인 장성역에서 내려서 슬슬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나 언덕길이 시작되었다. 속도를 많이 내지 않아서 숨이 그렇게 차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신호를 기다리느라 잠시 멈춰 서 있을 때 이마에도 등줄기에도 땀이 송글송글 솟아오르다 못해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역에서부터 한 30분 정도를 걸으니 눈앞에 탁 트인 풍경이 나타났다. 하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다였던. 언덕을 올라온 덕분인지 살랑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했다. 살살 땀을 식히며 계속 걷다 보니 김성종추리문학관에 닿았다. 김성종추리문학관에 도착해서는 가장 먼저 건물 규모에 놀랐다. 5층 정도 되는 규모의 단독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고요해서 어쩐지 조심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벽면이 온통 빼곡하게 책장이었다. 사이사이 빈 벽에는 여러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의 세피아 빛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약간의 텁텁한 종이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조심조심 둘러보는 데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어서 마치 마법 속 공간에 잘못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러다가 무슨 책이나 소품을 잘 못 건드리게 되고, 거기서부터 어떤 사건이 시작되는...
'딸랑' 상상의 나래는 때마침 들어오신 문학관 직원분의 등장으로 일시정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음료가 준비될 동안 다른 층을 구경했다. 2층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오래된 서적들과 물건들이 가지런히 유리 진열장 속에 앉아 있었다. 김성종 작가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명의 눈동자>는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으니까. 전시된 책과 물건들을 스윽 구경하고는 3층으로 향했다. 3층은 도서관 열람실과 닮은 모습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이곳에 대해 검색했을 때 이곳에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3층이 바다 방향으로 통창이 나있다고 해서였다. 그 리뷰에서처럼 바다를 향해 창이 시원하게 나 있었다. 다만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창 바깥쪽이 먼지로 시야가 뿌연 느낌이었지만 괜찮았다. 어떻게 보면 매끈하게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세련되기보다는 다소 투박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이 공간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 주문한 아아를 들고 3층으로 올라왔다.
뿌연 통창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커피를 마셨다. 사람이 없어서 냉방이 되지 않아 조금 더울 수도 있다고 직원분께서 우려하셨지만 뭐랄까 도서관 열람실 특유의 서늘한 느낌이 있어 괜찮았다.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거나 가져온 책을 읽으니 땀이 서서히 식었다. 바깥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 어느새 서늘하게 식은 땀의 온도와 덕분에 약간은 눅눅해진 옷의 촉감, 오래된 책들에서 풍겨오는 낡은 종이 냄새가 여름 방학을 떠올리게 했다. 바깥에서 한참을 신나게 땀 흘리며 놀다 들어와 그늘에서 멍하니 땀을 식혔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나지 않는 수많은 여름방학의 나날들.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 없이도 그저 아득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노스탤지어를 가만히 느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런 여름방학의 나날 중 하나로 기억되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