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목)
그러니까 나는 3년 전의 나를 달래주었다. 패들보드를 타면서.
SUP(Stand Up Paddle Board)을 처음 탔던 것은 3년 전이었다. 회사 1박 2일 여름 워크숍 때였다. 그날도 날이 흐렸다. SUP 체험에는 워크숍 전체 인원 중 일부, 나를 포함해 4명 정도가 참여했다. 간단한 강습 후에 바로 바다에 내던져진 우리는 패들보드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고군분투를 했다. 땅에서 균형 잡기도 쉽지 않은데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요가를 해온 게 도움이 되었는지 몇 차례의 시도 끝에 패들보드 위에 서는 데에 성공했다. 아슬아슬했지만 조금씩 요령이 생겨서 선 채로 패들링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광안대교를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한참을 신나서 패들링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이미 해수욕장과 보드에서 앉아서 패들링을 하는 사람들과 거리가 꽤나 벌어져 있었다. 그때 문득 마음속에 어떤 묵직한 감정과 함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도 되나? 멀어져도 되는 건가?' 순간 멈칫하며 패들링이 느려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패들보드를 돌려 다시 해변 쪽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부산에 셀프 유배를 간다고 하자 민주님이 친한 언니(이하 선생님)가 SUP 선수면서 부산에서 강습도 한다고 연결해 줄 수 있으니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했다. 3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어쩐지 꼭 다시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 내려와서 민주님께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선생님이 계신 업체를 알려달라고 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민주님은 미리 선생님과 연락을 해서 내게 연락처를 전달함과 동시에 언제쯤이 기상 상황이 좋아서 타기 좋을 거라고까지 전달해 주셨다. 민주님이 귀띔해 주신 날쯤에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선생님은 예약 절차와 함께 준비물을 알려주셨다. 1:1 강습이었고, 실내에서 30분 이론 수업과 30분 연습을 한 후에 2시간 정도를 바다에서 보드를 탄다고 했다.
연락을 주고받은 다음 날, 선생님과 약속한 시간에 공간에 들어섰다. 1:1 강습이라 선생님 밖에 안 계셔서 공간이 휑했다. 어쩐지 쭈뼛거리게 되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건강하고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셨다. 선생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이론 수업 30분과 실내 연습 30분이 진행되었다. 사실 3년 전에 처음 SUP을 접했을 때에는 회사 사람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단체 체험이어서 대략적인 내용과 안전 수칙 정도를 정말 간단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전날 선생님이 바다에 나가기 전에 도합 1시간 정도를 실내에서 보낸다고 했을 때 갸웃하기는 했다. 그런데 정말 이론 30분과 실내 연습 30분이 꽉꽉 알차게 채워졌다. 패들보드 각 부위별 명칭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인 주행을 위한 방법, 바람의 방향에 따른 패들링 방법 등 기초부터 차근차근 탄탄하게 알려주셨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패들링을 해야 하냐는 퀴즈 같은 것도 풀었다. 오래간만에 학생이 되어 무언가를 기초부터 배우는 느낌이 영 싫지 않았다. 워밍업 겸 패들보드를 타기 전 시뮬레이션을 하는 실내 연습까지 진행하고 나서야 바다로 향할 수 있었다.
3년 전 탔던 체험용 패들보드 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너비는 얄쌍한 입문자용 패들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섰다. 패들보드를 스윽 밀어내며 디딘 바닷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얼른 보드 위로 올라탔다. 처음에는 앉아서 패들링을 했다. 해변에서 조금 멀어지자 선생님께서는 한 번 일어나 보라고 했다. 3년 전 경험 덕분인지 다소 휘청이기는 했지만 보드에서 일어섰다. 약간은 엉성하지만 열심히, 선생님이 옆에서 코칭해 주시는 대로 패들링을 했다. (블레이드를 조금 더 깊게 넣어요. 패들 들 때 고개도 같이 들지는 말고. 샤프트를 잡는 손 간격을 조금 더 넓게 잡아도 좋겠는데. 패들이 발목 정도까지 오면 그냥 위로 들어요, 더 뒤로 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선생님이 입력을 하면, 나는 출력을 해내는 로봇처럼 뚝딱뚝딱 패들링을 하다 보니 3년 전 그날처럼 해변에서 꽤나 멀어졌다. 3년 전의 감정과 생각이 들어서려는 찰나, 옆에서 함께 패들보드를 타고 있던 선생님이 시원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저기 광안대교까지 가볼까요?" 계속해서 패들링을 하느라 팔과 다리는 점차로 무거워졌지만, 마음만은 어쩐지 광안대교에 가까워질수록 홀가분해지는 듯했다.
뚝딱뚝딱 패들링을 해서 어느덧 광안대교에 도착했다. 패들보드에 앉아 내 패들을 선생님께 내밀었고 우리는 잠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부산에 어쩌다 내려오게 되었는지, 퇴사를 왜 하게 되었는지, 첫 퇴사 경험은 내게 어땠는지를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SUP을 타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부산에 내려오기 전까지 어떤 준비를 했는지를 이야기했고, 우리는 함께 민주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민주님이 얼마나 유연하고 열려있는 사람인지를 이야기했다. 선생님과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수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순간 말문이 턱.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3년 전 명확하게 알지 못하던 묵직한 감정의 실마리가 손에 잡혔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저기까지 가도 되나? 혹시나 갔다가 한 소리 들으면 어떡하지...' 선을 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함께 온 사람들이 혼자서만 앞서 간다고 좋지 않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이 어떠한 선이든 타인의 시선이든 상관없이 일단은 갈 수 있는 만큼 나아가봐도 괜찮다고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이야기를 지금의 내가 3년 전의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게 참 위로가 되었다.
어떤 시기에는 누군가의 말, 어떤 책의 구절 등이 지금의 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다는 운명적인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날은 SUP을 타면서도 그랬고, SUP을 알려주신 선생님의 여러 이야기들이 그랬고, 김민철 작가님의 <무정형의 삶>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내 삶을 빚어내도 괜찮다고, 평생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내려놓고 그냥 관심이 가고 궁금한 일이어도 괜찮으니 일단 한 번 해보라고, 내가 설정해 둔 어떤 한계나 타인의 시선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이날 내가 했던 경험과, 선생님과 함께 나눈 이야기와 작가님의 책 속 구절구절을 늦은 밤까지 소중하게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