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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Jul 17. 2024

익숙해지지 않는 마음, 묵직해지기만 하는 다리

2024-07-16(화)

사과님과 함께한 사흘​이 지나고 맞이하는 아침. 신나고 알찬 시간을 보낸 후여서인지 비가 내리는 흐린 날이어서인지 잠에서 늦게 깼고, 잠에서 깬 후에도 한참을 침대에 푸욱 파묻혀 있었다. 모든 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으름이 나를 감쌌다. 평소 같았으면 게으름을 털어내려고 안간힘을 써서 겨우 몸을 움직여내거나, 게으름을 털어버리지 못한 경우에는 죄책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나를 감싸는 게으름에 기꺼이 굴복해 보기로 한다. 언젠가 직장 동료가 재미있게 봤다며 추천해 주었던 <나의 해방일지>를 틀어두고 침대에서 소파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렸다.


점심이 지나 오후가 되자 ‘그래도 근처 어디라도 마실 삼아 잠깐이라도 나갔다 와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이모 병원 이름 알려드려요. ㅇㅇ병원.
엄마가 00만 원 보낼 테니 이모 드리고 맛난 것 사드시라 해.
부탁한다.


부산에 사시는 둘째 이모가 원래도 몸이 약하신 편인데, 이번에 척추 쪽 수술을 받고는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엄마가 가보고 싶은데 이런저런 해야 할 일들과 소화할 일정들이 있기도 하고, 얼마 전 발목 인대를 다쳐 어려울 것 같다고. 내가 부산에 있는 김에 이모에게 다녀와줬으면 한다고. 문자를 읽으며 전날 전화로 내게 소식을 전하던 엄마의 잠긴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사촌언니에게 연락을 했고, 이모 저녁식사 시간 전에 병원을 방문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미리 얘기했던 시간보다 다소 늦어 종종걸음으로 병원에 들어서자 1층에 앉아있던 이모와 사촌언니가 반겨줬다. 평소 왕래가 거의 없었던 지라 가면서도 내심 쭈뼜거렸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움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모의 하얗게 센 짧은 머리, 푸석한 얼굴과 기운이 빠져 흐릿한 표정, 흰 환자복을 입은 여윈 몸, 그 몸을 지탱해 주는 묵직한 허리 보호대가 눈에 들어오면서 어쩐지 반가움이 머쓱해지고 다소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기력이 없는 이모의 말은 귀를 쫑긋 세워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앉아있던 사촌언니가 몇 차례 반복해 주었다. 몸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라 그런지 이모는 마음마저 많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모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모의 말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음 약한 소리들에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이내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졌고, 오전에도 이모부가 와서 여러 차례 병실 밖을 나오느라 더 지친 것 같다는 이모를 들여보냈다.


애써 밝게 웃으며 이모와 사촌언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병원 밖으로 나서는데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서 바로 지하철을 타는 대신 걷기로 했다. 비 오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시간을 정말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싶었다. 엄마가 발을 접질렸는데 인대가 나가서 입원했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집에 다녀온 것이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주 심각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것을 보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경험은 당최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지 이번에 이모를 보면서 또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것이다.


지금 내가 회사에 매여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입원했을 때, 이모가 입원했을 때 한 달음에 달려갈 수 있었으니까. 동시에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아 너무나 불안하고 무력하다 느끼기도 했다. 엄마아빠는 계속해서 나이 들어갈 텐데, 혹여나 이번처럼 사고가 나거나 혹은 어딘가 아파서 입원하게 되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지 싶어서.


평소에 답답한 일이 있거나 생각이 복잡할 때면 정처 없이 오래 걸었다. 다리가 묵직해지는 만큼 생각이 정리가 되거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다리만 묵직하고 뻐근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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