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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Jul 18. 2024

럭키비키한 경남 한 바퀴

2024-07-17(수)

부산에 셀프 유배를 오고 나서 알람을 8시쯤 맞춰놓기는 하지만 눈이 떠질 때, 몸을 일으키고 싶을 때에야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첫 숙소에서 두 번째 숙소로 옮기는 날이자, 진주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날이었다. 6시 반에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이미 긴장한 혹은 설레는 맘이 잠을 몰아냈다. 꼼꼼하게 짐을 챙기고, 2주 간 편안한 쉼의 장소가 되어준 곳을 정돈한 후 큰 짐은 보관함에 맡겨두고 숙소를 나섰다. 서부사상터미널에서 8시 40분 진주행 버스를 탔고, 10시가 조금 넘어서 진주에 도착했다.


터미널 밖을 서성이던 내 앞에 선 파란색 스포티지. 그 안에 쪠가 있었다. 내가 진주에 온 이유. 쪠는 대학생 대외활동을 하며 만난 친구인데, 진주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지금도 진주에서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자주 보기는 어려웠던 친구라 부산에 와서 가까워진 김에 만나고 싶어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쪠의 차에 올라타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다. 내가 퇴사까지 이르게 된 이야기, 부산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하면 쪠는 퇴사를 삼키며 꾸역꾸역 버텨낸 이야기, 언젠가가 될지는 모르지만 넥스트를 위해 차근히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쪠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과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을 주고받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과 곱씹었던 생각들을 더 구체화하거나 더 확장해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약 1시간 반이 안 되는 시간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드라이브하다 보니 쪠가 꼭 가고 싶다던 남해의 식당에 도착했다. 평일에도 웨이팅이 꽤나 있는 곳이었는데, 테이블링으로 원격 줄 서기를 한 덕분에 우리는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한 듯 하지만 다양한 해산물이 알차게 들어가 있는 솥밥과 튀김옷 같은 식감이 인상적인 파전을 옴뇸뇸 먹었다. 맛있는 곳에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하니, 쪠는 '언니가 온다는 핑계로 겸사겸사 저도 여기 오고 싶은 사심을 채운 거예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맛있는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남해 읍내로 향했다. 쪠가 가고 싶다고 한 카페 두 곳이 문을 닫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남해 읍내에 카페가 꽤 있어서 카페인을 충전할 장소를 찾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와 함께 커피를 마실 생각에 모닝 카페인을 건너뛰었다던 쪠는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들이켜더니 결국은 한 잔을 더 주문해 마셨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또 웃었다. 


쪠와 나 둘 다 J 성향이지만 이번 만남과 여행만큼은 정말 아무 계획도 없는 P의 여행이었다. 아직 여유 시간이 많아서 어딜 갈까 곰곰 고민하다가 쪠가 남해에 미국마을이 있다며 한 번 가보자고 했다. 독일마을은 들어봤는데 미국마을? 궁금함에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30분 조금 넘게 달렸을까? 자유의 여신상과 닮아 있는 동상과 가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텍사스 어딘가가 연상되는 집들이 늘어선 곳에 도착했다. 미국마을이었다. 차에서 내려서 쪠와 함께 걸었다. '마을 끝까지 한 번 걸어볼까요?' 하는 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왜 미국마을일까?' 물었다. 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쎄요. 독일마을은 파독 다녀오신 분들이 자리 잡으셔서 독일마을이라던데, 여기는 왜지...'라고 답했다. 생각보다 텍사스풍(?)의 집의 행렬은 생각보다 일찍 끊겼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계속 언덕을 올랐다. 희뿌연 안개에 홀린 듯이.


그러다 갑자기 마주친 '한려해상국립공원' 표지. 지도앱을 켜보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절이 하나 있었다. 이왕 올라온 김에 그 절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경사가 꽤나 가팔랐지만 PT와 유산소로 다져진 쪠와 최근 두 달간 열심히 요가를 수련해 온 나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산을 올랐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산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졌고 살갗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점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현실감이 점점 사라지는 듯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쪠의 얼굴에 얼떨떨함이 서려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내 얼굴에도 같은 얼떨떨함이 내려앉아 있었겠지. 공기에 물기와 한기를 불어넣는 콸콸 흐르는 폭포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함께 내질렀던 탄성도 닮아있었을 것이다. 


세심교(洗心橋)를 지나고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드디어 용문사 경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안갯속에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웅전이 뿜어내는 위용이 엄청났다. 그 앞에 의젓하게 앉아있던 흰색 멍뭉이가 아니었다면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벌컥 일었을 것만 같다. 굳어진 마음을 한 순간에 무장해제시킨 멍뭉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손을 코 쪽으로 내밀었는데 미동이 거의 없었다. 간혹 겁이 많고 소심한 친구들이 이렇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듯하다가 왕! 물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괜히 긴장하게 되었다. 손을 조심스레 옮겨서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는데 갑자기 멍뭉이가 움찔 움직이려 해서 확 긴장이 된 순간, 멍뭉이는 근엄하게 벌렁 배를 내주었다. 굳어있던 내 얼굴이 웃음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조심스럽던 손은 바쁘게 멍뭉이의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멍뭉이의 배를 쓰다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짙은 산안개가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 사이에서 나뭇잎도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놀음을 즐기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닌가 멍해졌는데, 언젠가부터 쪠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무언가에 홀린 건가 덜컥 겁이 나려던 찰나 쪠가 인스타 스토리에 날 태그했다는 알림이 왔다. 휴우... 안심.


때마침 어디선가 등장한 스님께서 '강아지 괴롭히지 말아요~'라고 장난스레 말씀하셔서 '얘가 먼저 저한테 왔는데요~' 장난스레 답하며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쪠를 찾으러 대웅전에도 갔다가 칠성각에도 갔는데, 더 오를 곳이 있었나 싶은 언덕길 비탈 위에서 ㅈ이 내려오며 나를 다급히 찾았다. '언니, 빨리 이리 와봐요!' 쭐레쭐레 그렇지만 경내라서 약간의 조심성을 담은 속도로 ㅈ을 좇아갔다. 쪠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계단 하나와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수국이 보였다. '언니, 여기 한 번 올라가 봐요!' 짙어지는 안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이내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부처님이 안개를 뚫고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 나중에 올라가서 보니 지장보살님이었지만. '엄청난 경험 설계다...'라는 이상한 감상을 머릿속에 담은 채 아마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는 그곳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러다 쪠와 눈이 마주치고는 또 어이없는 듯 피식 함께 웃음을 터트려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말... 오늘 뭔가에 홀린 게 분명해.'


꿈만 같은 비현실적인 경험을 함께한 우리는 현세로 다시 돌아내려왔다. 길을 잘못 들어도 '이렇게 된 김에 해안도로로 달려볼까요?' 하면서 바다 구경도 하고, 잠시 차에서 내려 짭짤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하동을 거쳐서 가다가 어제 오픈했다던 쪠의 사촌동생이 운영하는 사천에 위치한 횟집에 들러 전어회를 양껏 먹기도 했다. 쪠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일순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오늘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게요. 언니랑 처음 만났을 땐 이런 것들을 함께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요.' 같은 말들이 우리 대화 사이사이에 양념처럼 곁들여졌다. 


진주-남해-하동-사천로 이어졌던 길고 긴 드라이빙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진주로 들어오는 길. 차분한 피아노 전주가 나오자 쪠가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언니, 이 곡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 요즘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더라고요.' 4분 정도 아까보다 커진 볼륨의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가만한 권진아의 목소리와 어딘가 벅차오르는 음악, 다정하고 섬세한 가사에 함께 귀 기울이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그러네... 엄마가 아이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근데... 나한테는 덕후의 이야기로 들려...' 그 말에 둘 다 빵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그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다가 대외활동이라는 하나의 접점에서 우연히 만난 쪠와 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 아이 돌'과 '우리 아이돌'이라는 각자의 방향으로 또 나아가며 멀어질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먼 훗날 언젠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꿈만 같았던 이날을, 계획된 것 하나 없었지만 그렇기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럭키비키한 이날을 떠올리며 피식 새어 나올 웃음은 그 모든 거리감도, 시간 감각도 다 뭉개버리며 우리를 안개가 자욱했던 산속으로 데려다 놓겠지. 그것만으로도 그 어느 날의 나는 럭키비키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지. 쪠 너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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