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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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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Dec 10. 2018

재미가 없어도 여행을 한다

#베트남일기 3. 그래도 하루의 끝은 아름다웠어


감기가 떠나질 않는다. 평소의 나는 병원도, 약도 멀리하지만 이번에는 감기와 여행이 겹쳐 별 수 없이 병원도 다녀오고 약도 지어왔다. 그리고 꼬박꼬박 매 끼니마다 알약 여러 개를 입에 털어 넣는다. 옷도 비교적 두텁게 다니고 있는데도 도무지 감기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자주 아프지는 않지만 한번 감기에 걸리면 호되게 앓는 편이라 조심했건만 하필 여행과 겹치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M 역시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독감에 걸려 홀로 골골대며 여행에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니란 것. (둘 다 골골대고 있다.) 분명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아프긴 하지만 즐거운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여행이고 뭐고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예전 같으면 할 일이 없어도 신나게 했을 동네 산책을 이번에는 거의 의무로 생각하고 했다. 재미없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도 여행은 여행이니까 많이 봐 둬야지.


호안끼엠 호수 근처 잔디밭에 꽃을 심고 있었다.


이번 베트남 여행은 하노이에서 그치지 않고 베트남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는 <사파 Sa Pa>도 가보기로 했다. 베트남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한 곳이라는데 처음 사파에 가기로 마음먹을 때만 해도 둘 다 건강했던 터라 개의치 않았지만 이제 와서 가려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텔도 다 예약해두었겠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몰라 가보기로 했다. 하노이나 사파나 이 상황에선 어차피 둘 다 춥다.

하노이에서 사파는 이동거리가 꽤 있는 만큼 주로 슬리핑 버스나 야간열차를 이용한다. 슬리핑 버스도 야간열차도 둘 다 포기할 수 없던 우리는 고민 끝에 사파에 갈 때는 야간열차를, 돌아올 때는 슬리핑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야간열차의 경우 하노이 기차역에서 직접 예약하면 더 저렴하다 했지만 움직이기 귀찮았던 우리는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 있는 '리멤버 투어'라는 한인 투어사에서 예약했다. (리멤버 투어는 한인 투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국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4인실을 한 명당 30달러로 예약했다. 다른 사람들은 직접 예약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는데 우리가 봤을 땐 그다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오늘은 바우처만 받고, 내일 오후 다섯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 다시 방문하면 바우처를 티켓으로 바꾸어준다고 했다.



티켓을 예약하고 나오는 길에 불현듯 생각난 포켓몬 고. 아마 이때까지는 국내에 포켓몬 고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창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때 일본에서 미친 듯이 포켓몬을 잡고 쉬다가 해외만 나가면 또다시 미친 듯이 포켓몬을 잡고 돌아다녔다. 하노이에서는 포켓몬 고 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번뜩 생각이 났다. 호안끼엠 호수 근처를 산책하며 어플을 켜보니 된다! 포켓몬을 잡을 수 있어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탄식했다. 여행 내내 이것만 붙잡고 있으면 어쩌지… 불굴의 의지로 고라파덕만 몇 마리 잡고 껐다. 호수 근처라고 물속성 포켓몬만 잔뜩 나오네.



하릴없이 호수 주변만 걷다가 M이 마트 같은 곳에서 주전부리를 사고 싶다고 해 근처 마트를 찾아보았다. 마침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VIN MART>라는 곳이 있어 갔더니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마트가 아니었다. 어느 층을 가도 옷만 팔길래 뭐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식품류도 팔던 VIN MART는 우리가 간 곳이 아닌 한 시간 거리에 있던 또 다른 VIN MART 같았다. 시간도 많겠다 조금 더 돌아다니며 다른 마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트를 찾다 M이 가고 싶어 했던 카페를 찾았다. 딱히 이름 있는 카페가 아니고 이렇게 거리에 낮은 의자를 깔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카페면 다 괜찮다고 했는데 마침 우리 눈에 들어왔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베트남까지 가는데 유명한 연유 커피는 마셔봐야지' '연유 커피는 맛있대'라고 소곤대던 지인들의 말이 떠올라 M과 함께 연유 커피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오토바이 클랙슨 소리가 있으니 따로 bgm을 틀지 않아도 되네. 카페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우리나라에서 카페를 한다면 이런 카페를 열어야지. 낮은 테이블과 낮은 의자, 콘센트가 없는 곳. (정작 나는 노트북 작업하기 좋다는 이유로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콘센트가 있는 스타벅스만 찾으면서.)



연유 커피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연유가 들어있으니 아무리 커피가 쓰다 해도 마실만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에! 쓰다 써. 단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커피는 정말 아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호안끼엠 호수 옆에 있는 또 다른 마트인 <INTIMAX MART>에 들렀다. 이곳은 아까 찾은 곳보다 호수와 더 가깝고 여행자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가 더 수월했다. 규모도 꽤 커서 거진 모든 생필품은 다 있어 보였다. 우리는 간단하게 컵라면과 과자 몇 개, 그리고 맥주 두어 캔만 집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컵라면과 맥주 한 캔씩. 유명해서 산 분홍색 컵라면에는 미미하지만 고수 맛이 나서 조금 먹다 말았다. 정말 어지간한 건 다 먹겠지만 고수는 전혀 못 먹겠다. 아주 조금만 들어가도 그 맛이 확 나서 먹다 내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맥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을 집어 든 것인데 탄산도 약하고 조금 밋밋해서 역시 조금 마시다 말았다. 아, 생각해보니 아직까지 하노이에서 맛있게 먹은 게 없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이 점점 더 불안해진다.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곳
혹은 하노이에서 꼭 가야 할 곳


아마 십중팔구 <성 요셉 성당-하노이 대성당->을 말할 것이다. 할 것도 없겠다 우리도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구글 지도를 켜지 않고 길에 있는 도로명 표지판과 손에 든 종이 지도만 들고 찾아가 보았다. 각 골목마다 표지판이 잘 자리 잡고 있어 길을 찾는 게 많이 어렵지는 않았다. 길 찾기에만 집중해서 골목의 이모저모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지 않을까 했는데 되려 구글 지도를 볼 때보다 더 골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한 골목은 아기자기한 펍과 카페로 가득해 M과 나 둘 다 여긴 꼭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내일 밤 이곳에 있는 펍 중 한 군데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종교가 없어서인지 교회나 성당 같은 건축물에 크게 감흥이 없던 나도 너무 좋았던 성 요셉 성당.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라 그런지 더 좋았다. 성당 옆쪽에 나있는 문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자리를 잡았다. 어두운 내부에 먼저 앉아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어 더 오래 가만히 앉아 눈으로 담았다. 높은 창에 달려있는 글라스 데코에 압도당하고, 성당 안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따라 덩달아 경건해졌다. 성당 바로 앞쪽만 해도 시끌벅적했는데 성당 안은 고요 그 자체였다.



기도는 올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으로 이것저것 바라는 것을 말하고 나와 성당 밖을 둘러보았다. 나에겐 엄청 경건한 곳이었는데 아이들에겐 마냥 신나는 곳이었는지 성당 주변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무렴 어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호텔로 들어갈까 아니면 뭔가를 더 해볼까 하다 감기가 조금 나아진 듯싶어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하노이에서 가장 큰 시장이기도 하고 기념품을 사기도 좋다는 <동쑤언 시장>에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거리가 꽤 되어서 표지판만 보고 가기엔 무리다 싶어 구글 지도를 켰다. 오토바이 부대를 지나쳤다 싶으면 또 다른 오토바이 부대가 나오고 지나쳤다 싶으면 또 나오고. 어린아이들도 많은데 이렇게 쌩쌩 달려도 되는 걸까. 물론 그들이 알아서 잘 피해 가긴 하지만 아이들이 움직이는 반경이 어른처럼 한정적인 것도 아니고 앞만 보고 걷다가 언제 옆으로 튈지 모르는데.



걷던 중에 맛있는 냄새가 나서 두리번거리다 본 옥수수.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허기가 져서 옥수수 하나를 샀다. 즉석으로 작은 숯불 위에서 옥수수를 구워주었다. 이 옥수수가 내가 하노이에서 먹은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수많은 오토바이를 지나쳐 도착한 동쑤언 시장. 시장 안에도 오토바이는 많았지만 볼거리나 먹거리는 없었다. 기념품 사기 좋다는데 글쎄, 나는 딱히 기념품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지 못했다. 야시장이라서 먹거리를 기대했는데 그도 시원치 않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래도 시장이 이렇게 넓은데 뭐 하나는 있겠지 하고 구석구석 다 돌아보았으나 건진 것은 없었다.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맥주 거리에나 가서 뭔가를 먹기로 했다.




알고 보니 우리 호텔과 꽤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맥주 거리>. 호안끼엠 호수 방향으로만 가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호수 반대편으로 한번 돌아볼까.



맥주 거리는 그 이름답게 많은 펍과 식당들이 있었고 그만큼 호객행위도 어마어마했다. 호객행위 홍수에서 고기를 맛있게 구워 먹고 있는 여행자들을 발견,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분명 그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우리에겐 그저 그랬다. 땡모반은 굉장히 맛있었지만 고기도, 파인애플 볶음밥도 전부 별로. 쌈장이 있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M과 나의 입맛은 꽤나 다른 편인데 우리 둘 다 맛없게 먹었다면 그 집은 정말 맛없는 거야. 하노이에 와서 식사 다운 식사를 한 적이 없다. 동쑤언 시장에 이어 맥주 거리도 실패. M은 그 자리에서 맛집을 찾기 시작했고, 내일은 꼭 백종원이 추천한 쌀국숫집에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반미 집에서 백종원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고 난.




마사지-저녁 산책때는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 유일하게 아이폰으로만 사진을 찍었다.


마사지도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하루의 끝은 아름다웠어


거진 나의 모든 여행이 그렇듯 이번 하노이 여행도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사파로 이동한다는 거 빼곤 계획이 없어서 오늘 하루는 정말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할게 없어지면 호텔로 돌아와 쉬다 나가곤 했는데 저녁까지 먹고 나니 또 할게 없었다. 그래서 다시 호텔로 돌아와 가만 누워있다가 '딱히 할거 없으면 마사지나 받으러 갈래요?'라고 얘기를 꺼냈더니 M도 좋은 생각이라며 바로 마사지샵을 찾기 시작했다. 멀리까진 가지 못할 것 같아 호안끼엠 호수와 성 요셉 성당 사이에 있는 <반 쑤언 마사지>로 갔다. (지금 찾아보니 짠내투어에 나왔단다.) 마사지는 형편없었다. 명절에 용돈 받은 조카가 친척들 어깨 주물러주는 느낌. 시원한 맛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어깨와 다리는 하는 둥 마는 둥이었고 마사지를 받아도 크게 의미 없는 등만 세세하게 만져줬다. 1번 척추는 여깄구나, 6번 척추는 여깄구나 이런 느낌으로. 결린 어깨와 걷느라 지친 다리를 시원하게 해 줄 줄 알았건만.


그래도 아까까지만 해도 피곤해서 숙소에 돌아가면 바로 자고 싶었는데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졌다. 그래서 호안끼엠 호수를 산책하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주말 야시장이 열림과 동시에 호수 주변의 교통을 통제해서 오토바이가 단 한 대도 없었다. 낮에만 해도 수백 대의 오토바이가 오가던 곳이 이젠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통의상을 입고 이름 모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단체로 스포츠 댄스를 추는 사람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호안끼엠 호수를 가득 채웠다. 피곤하다고 마사지고 뭐고 그냥 잤더라면 못 보고 지나쳤을 풍경들. M과 그 사이를 걸으며 '마치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속에서 나와 M만 금방이라도 하늘 위로 붕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재미없는 하루였는데 순식간에 아름다워졌다. 이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모든 것이 별로였던 하루라도 단 하나가 포인트가 되어 그 하루를 뒤바꿔버리는.


2017년 11월 13일

캐논 EOS 550D / iPhone 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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