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일기 3. 멀고도 험한 방비엥 가는 길
여기는 모든 게 느려요
환전한 돈의 액수가 커서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도 사원을 구경하고, 비엔티엔의 골목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돌아다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 입구에 앉아있으니, 9시 정각에 트래블라오 직원이 우리의 유심칩을 가지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를 쓰고 있던 나는 뾰족한 무언가가 없으면 유심칩을 갈아 끼우기 힘든 아이폰을 한껏 비웃으며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한국에서 유심칩을 사 가면 유심을 쉽게 빼고 꽂을 수 있는 핀을 주지만 현지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J는 유심칩 갈아 끼우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핫스팟을 켰다. 드디어 숙소가 아닌 곳에서도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
라오스 돈도 있고 와이파이까지 빵빵해지니 우리는 풍족한 여행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를 싣고 방비엥으로 떠날 버스만 도착하면 모든 게 딱이야. 9시 30분 픽업이라 시간적 여유가 생겨 게스트하우스 앞을 슬슬 걸어 다녔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좋았다.
그러나 약속한 9시 30분을 지나 10시가 다되도록 예약한 여행자 버스가 보이질 않았다. 혹시 예약을 잘못한 건가 싶어 큰길까지 나가보았으나 버스는커녕 움직이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비엔티엔 내에서의 이동이면 몰라도 비엔티엔에서 방비엥, 도시 간의 이동이라 여기서부터 계획이 흔들리면 여행 전체가 흔들리게 돼버려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만일 버스가 우리를 놓고 간 것이라면?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거라면? 한국도 아니고 타지에서, 그것도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시 간 이동을 하지? 버스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별별 생각을 다했다. 마냥 기다리기에는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났기 때문에 트래블라오에 접속해서 비상 연락망을 찾아 직원의 도움으로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아직 이동 중이니 조금 더 기다리란다. 그제야 불현듯 인터넷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여기는 모든 게 느려요."
지금의 나라면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예약한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겼거니 하며 다른 이동 방법을 찾을 만큼 여유가 생겼지만 이때의 나와 우리는 작은 뒤틀림 하나에도 벌벌 떨었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성급하기로는 순위를 다툴 만큼 성질 급한 나였으니 처음 경험한 이 곳의 '느림'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우리를 픽업하러 버스가 왔다. 아니 버스가 와야 하는데 툭툭이 왔다. 툭툭을 보자마자 당황했다. 방비엥까지 4시간이 넘게 이 툭툭을 타고 가야 한다고? 당황스러움을 지나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정도의 불편함까지 감수할 배낭 여행자의 마음이 준비되어있지 않다고! 하지만 다행히 툭툭은 비엔티엔 시내 어느 곳엔가 서있던 여행자 버스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라오스에서는 어떻게든 사고가 난다
여행자 버스는 '여행자'라는 이름이 붙은 것과 달리 일반 고속버스였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버스 커튼에 적혀있던 한국어. 한국의 오래된 고속버스를 수입했나 보다. 오래된 버스라 해도 한국어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라오스 여행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것 중 하나가 이동 중 발생한 사고 뉴스였다. 심야 슬리핑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라오스 내에서만 운행하는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했단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까지도 사고가 났다는 글을 보았기에 내심 걱정이 컸는데 그래도 한국 버스라면 사고 위험이 적지 않을까 하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본 꿈같았던 풍경. 창문이 지저분해서인지 창밖이 뿌옇게 보였는데 이게 또 꿈에서 보는 모습 같았단 말이지.
이동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여행 전 찾아본 여러 블로그에서 화장실은 돈을 받으니 잔돈을 준비해 가라 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새로 짓는 중이라 그랬는지 돈을 받지 않았다. 다만 양쪽 화장실 중 한 군데만 이용 가능해서 남녀 구분 없이 모두 그곳을 이용해야 했다. 선생님, 문 밑이 시원하게 뚫려있는데요.
휴게소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서 가볍게 기분을 냈다.
어느덧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 하나 둘 사라지고, 울창한 나무 숲이 나타나는가 하면 고만고만한 작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로 멍했냐면 뚝-하고 잘 가던 버스가 멈추고, 계속해서 이 풍경을 보여주는데도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어느덧 이곳의 느림에 물든 것인지 그냥 "아, 신호를 기다리나 보다." 했다. 아마 이 상태로 몇십 분을 있었나 보다. 서서히 내 성급함이 다시 깨어나면서 "왜 출발하지 않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한참을 이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에도 듬성듬성 빈자리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출발할 기미가 안보이길래 일단 우리도 버스에서 내렸다. 드문드문 영어로 왜 버스가 출발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앞쪽에서 사고가 났단다. 방비엥으로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큰 트럭 한 대가 다리를 코 앞에 두고 망가져버렸단다. 슬렁슬렁 사고 지점으로 가보니 작은 툭툭이 아니고선 어떤 교통수단도 다리를 건널 수 없겠더라. 다리는 좁은데 트럭은 너무나도 커서 본의 아니게 길을 막아 다리 건너편도, 이편도 버스가 오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냥 트럭이 고쳐지길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트럭을 고치는 현지인들도 또 그것이 고쳐지길 기다리는 외국인들도 어느 하나 인상을 쓰고 있지 않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며 한창 울상을 짓고 있던 우리마저도 "버스가 안 구르니 별 사고가 다 생기네."하며 웃어넘길 정도였다. 이상한 곳이었다. 분명 내 여행에 큰 차질이 생긴 건데도 그냥 그 순간이 즐겁고 웃음이 나왔다. 오늘 안에 고쳐지기만 하면 무엇이 문제인가 싶었다.
버스로 되돌아가지 않고 다른 외국인들처럼 사고 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라오스에 온 지 하루도 채 안되어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 여유와 별개로 우리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는 버스 기사에게 조금 화가 났다. 궁금하면 그냥 승객들이 알아서 내리고, 알아서 묻고, 알아서 알아봐야 했다. 설명이 없으니 어떠한 수습도 없었다. 그냥 기다리라는 말뿐. 그러나 여기서 팁 하나, 이에 대한 불쾌함도 정말 순간만 치고 사라진다. 왜냐면 지금 여기는 라오스니까.
풍경도 보고 닭인지 무엇인지 모를 꼬치도 사 먹고, 돈 내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음에도 트럭은 고쳐지지 않았다.
히치하이킹, 한 번 해봐?
버스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데 우리랑 같은 버스를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버스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걸어가려는 건가? 생각하는데 지나가는 툭툭을 잡고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단번에 성공. 그것을 보고 우리도 용기가 생겨 히치하이킹을 해보기로 했다. 버스 기사에게 히치하이킹을 하겠다 말을 하고 배낭을 꺼냈다. 그런데 딱! 우리가 배낭을 꺼내 들자마자 앞으로도 2시간은 더 기다려야 고칠 수 있다던 트럭이 고쳐졌단다. 그 말에 우리를 포함한 모두가 마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장도 아닌 라오스의 좁은 산 길 위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웃으며 소리쳤다. 꺼내 든 가방을 다시 집어넣고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생각해보니 우린 히치하이킹을 해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다. 현지인들과 우리의 대화가 수월하게 이뤄졌을 리 만무하다. 그것도 산속에서. 히치하이킹을 했던 사람들은 외국인은 아니고 태국인이나 현지인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들은 툭툭을 타고 사라졌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본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또다시 버스가 움직였다. 이제 제대로 가자, 방비엥으로!
2015년 11월 27일
캐논 파워샷 g7x
2018년 10월 2일
얼마 전부터 조회수가 확 늘어났는데, 오늘 이 글이 브런치 메인에 걸렸다! 신기하고 기쁜 마음에 PC와 모바일을 둘 다 켜서 캡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