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일기 6. 국제거리에서 아메리칸 빌리지까지
오늘의 날씨 : 맑음
오늘의 운동 강도 : 최상
특이사항 : 경미한 화상을 입음
아메리칸 빌리지
우린 자전거 타고 갈 거야
오늘의 일정은 아주 단순했지만 그에 비례하여 아주 힘들었다. 오늘 우리가 한 일은 단 하나, 자전거 타고 <아메리칸 빌리지> 다녀오기. 국제거리에서 아메리칸 빌리지는 왕복 30km 거리로, 운전도 마라톤도 하지 않는 우린 30km의 위엄을 몰랐다. 내가 가늠 가능한 거리는 2km.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전철역까지의 거리다. 당시 2km 정도는 금방금방 걸어 다녔기에 항상 '고작 2km 정도'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왕복 30km는 그때 그 거리를 15번 정도 왕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쉽게 생각했다. 거기다 오키나와 여행쯤의 나는 자전거에 푹 빠져있었기에 "자전거 조금 오래 타면 재밌고 좋지 뭐"라고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이건 나의 어마어마한 계산 착오였다. 오늘 우리가 달린 30km는 몇 년 전 아르바이트할 때의 그 길처럼 평지가 아니었고 그때처럼 그늘이 많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때처럼 '2km 가고 끝'이 아니라 2km의 7배는 되는 거리를 쉼 없이 달려야만 했다. 아메리칸 빌리지로 떠나는 아침까지만 해도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자동차 그까짓 것 없어도 자전걸로 갈 수 있다 이거야.
자전거 빌리러 가는 길. 여기저기서 쉽게 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국제거리 근처에서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마저도 찾아두었던 류보 백화점 부근의 렌탈샵은 없어진 지 오래. 다행히 인터넷을 뒤져 미에바시역 근처에 있는 자전거 렌탈샵을 찾았다.
푸른 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날씨가 좋으니 내 기분도 더 좋아졌다. 어제 일찍 자서 몸 컨디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보증금 6,000엔을 내고 (자전거 반납 시 돌려준다) 자전거 두대를 빌렸다. 그리고 드디어 구글 지도를 켜고 달리기 시작. 시작이 좋다.
오키나와 국도 따라 15km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까지는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비록 시작부터 오르막길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정도야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허벅지가 당기기 시작했고 눈앞의 작은 언덕도 무서워졌다. 그러던 차에 우리 앞에 어마어마한 언덕이 펼쳐졌다. (돌아오는 길엔 그 언덕을 언제쯤 지나쳤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 걸 보면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 언덕을 올라가면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못할 거 같아 그곳을 피해 멀리 돌아갔다. 구글 지도를 벗어나긴 했지만 다시 잡아줄 테니. 하지만 이 결정은 오늘 우리의 자전거 여행을 힘들게 만든 가장 큰 폐인이었다. 왜냐면 이 언덕을 피하려다가 더 길고 더 높은 언덕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지도에는 언덕 표시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삥 돌기만 하는 평지겠지라고 쉽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라고, 힘들게 오른 것 그 이상으로 재밌게 내리막길을 내려오긴 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테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발견한 귀여운 표지판. 자전거 타고 달리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 너무 찍고 싶은 것이 나타나면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국도를 따라 달리려 했으나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생각해보니 뭔가 위험할 것 같아 일부러 지도의 '도보'탭을 클릭, 도보 지도를 켜고 마을 안으로 달렸다. 그러나 그렇게 달리다 보니 크고 작은 언덕도 많이 나타나고 비좁은 골목도 많았다. 게다가 마을 안이다 보니 언제 어디서 차가 튀어나올지 몰라 더 위험했다. 결국 우리는 도보 지도를 끄고 자동차(내비게이션) 탭을 클릭, 국도로 나갔다.
아, 처음부터 국도로 달릴걸. 걱정 투성이었던 국도는 잘 정리된 도로 위로 달리다 보니 덜 위험했다. 가끔씩 만나는 자전거 탄 사람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재미도 있었다. 괜히 겁에 질렸었구먼. 이후 페달을 밟기만 할 뿐 그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간간히 지도를 확인하며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드디어 마을 너머로 바다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쯤부터는 국제거리보다 아메리칸 빌리지에 훨씬 가까웠다. 사실 바다가 보이는 순간 이후부터가 제일 힘들었던 구간임에도 바다 옆을 달린다는 사실 하나로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아메리칸 빌리지
그렇게 두 시간 이십 분을 달려 도착한 아메리칸 빌리지. 나하에서는 볼 수 없던 (영화 세트장에서나 볼법한) 이색적인 간판들이 줄지어 나오더니 이윽고 저 멀리 관람차가 보였다. 관람차가 보일 땐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감동도 금방,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픈 게 먼저라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식당부터 찾았다. 미리 찾아두었던 맛집까지 갈 여유도 없어 P가 지난 여행에서 갔다던 <타코 라이스 집>에 갔다.
타코 라이스 큰 것 하나와 타코 두 조각, 메론소다를 시켰다. 메론소다는 오사카 난바에서 마신 게 훨씬 더 맛있었지만 타코 라이스와 타코는 둘 다 맛났다. (이때가 태어나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먹은 타코라 크게 비교대상이 없긴 했다.) 한창 타코를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허세 뿜뿜인 일본 남자 서넛이 들어와서 서로 비디오를 찍어주기 시작했다. 브이로그인지 개인 방송을 하는 건지 뭐라 뭐라 말하면서 허세 가득한 동작들을 하는 바람에 웃음 참느라 혼났다.
맛있게 먹고 아메리칸 빌리지에 있는 가게 몇 곳을 구경했다. 기대했는데 딱히 둘러볼 것이 없어 실망했다. 그래도 두 시간이나 달려왔는데 고작 타코 하나 먹고 돌아가긴 아쉬워 아메리칸 빌리지 옆에 붙어있다는 <선셋비치>로 갔다. 사실 국제거리로 바로 돌아갈 체력이 되지 않은 게 더 큰 이유지만.
선셋비치는 보잘것없던 아메리칸 빌리지보다 훨씬 좋았다. 살짝이지만 바다에 발도 담가보고 사진도 찍고 시원하게 트인 바다도 보고.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이토록 오래 바다를 바라본 게 얼마만인지. 비록 아메리칸 빌리지에서 한 것이라곤 점심 먹고 선셋비치 본 게 다지만, 선셋비치가 너무 좋아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또다시 15km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국제거리까지 돌아오는 길은 고통이었으나 그래도 한번 와본길이라고 국도를 달릴 때는 지도를 보지 않아 생각보다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올 때와 달리 풍경을 보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그늘이 보이면 그 아래로 피하기 급급했지, 도저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쉬는 시간도 줄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슬슬 내가 아는 동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도를 지나 어느 정도 국제거리랑 가까워졌구나 싶었을 땐 구글 지도의 안내를 무시한 채 달렸다. 예뻐 보이는 골목이 있으면 거기다 그늘까지 있다면 좋다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 달리기도 하고, 지도가 오르막길을 알려주면 그냥 눈앞에 보이는 평지로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떨어진 체력을 더 떨어지지 않게 유지한 채 달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국제거리로 오는 길에 보니 우리 둘 다 손이 벌겋게 익어있었다. P는 탄 거 아니냐고 했는데 이건 탄 수준이 아니라 화상이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짧은 P는 목 뒤도 벌갰다. 반바지를 입었던 나의 두 허벅지도. 만져보니 뜨끈뜨끈 따갑기까지 했다. 아, 이건 진짜 화상이다.
돌아온 국제거리는 평소보다 더 들떠있었다. 일요일에는 오후 여섯 시까지 국제거리를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는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도로 한복판도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이벤트를 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물론 우리는 이 틈에 끼어들 정신도 체력도 없었지만.
화상도 이벤트도 중요한 게 아니다. 점점 손과 허벅지가 따가워지기 시작했지만 그 따가움 보다도 허기짐이 더 컸다. 그러고 보니 우린 늘 배고픈 게 앞서네. 아무튼 그래서 또 <얏빠리 스테이크>에 갔다. 원래는 햄버거를 먹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에너지를 쓰고 고작 햄버거를 먹는다는 건 우리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고기로 메뉴를 바꿨다.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은 밥과 샐러드를 퍼와서 먹었음에도 어제 같은 배부름은 없었다.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화상 연고를 샀다. 씻을 때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들어가 있었는데 햇빛이 닿은 부분은 전부 다 따가웠다. 그래도 꾹 참고 몸을 눅진눅진하게 풀었다. 화상에 근육통까지 얹어지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몸을 풀어줘야 해. 그렇게 꽤 오래 들어가 있다 나와 화상 연고를 발랐는데 와 냄새가 정말 지독했다. 끈적거리긴 또 엄청 끈적거려서 옷도 한참 뒤에나 입을 수 있었다. 아마 다음에 오키나와를 온다면 아메리칸 빌리지를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정말 혹시 만약에라도 가게 된다면 자전거는 안 탈래.
둘 다 씻고 나와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자니 또다시 배가 고파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누워있다고? 자전거 때문에? 그렇지만 이 이상 뭔가를 더 할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자자니 쉬이 잠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옷만 갈아입고 편의점에 갔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인 패밀리마트에는 내가 먹고 싶어 하던 유부초밥이 없어서 패스. (이와 중에도 먹고 싶은 메뉴는 확고하다.) 조금 더 걸어 우리가 좋아하는 로우손에 갔으나 그곳에도 유부초밥은 없었다. 하지만 로우손의 최고 PB 상품인 만두는 있지! 유부초밥은 살 수 없었지만 대신 만두와 컵라면, 락교, 타마고 산도를 사들고 왔다. 얼추 다 먹으니 이번엔 제대로 배가 불렀다.
아, 이렇게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밤이 가는구나.
2018년 3월 18일
캐논 EOS 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