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찾은 나만의 베이스캠프
" 도심에 새로운 클라이밍장이 생긴대.”
얼마 전 합류한 새 랩메이트 P가 내게 전했다. 나는 바로 인터넷을 켜서 검색해 봤다. 새로 생기는 클라이밍장은 학과 건물과 집에서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낯선 땅에서 버텨내고 있던 내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클라이밍장에 가면, 머릿속이 비워졌다. 루트를 파인딩 하고 벽에 매달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사라졌다. 몇 개의 루트를 깨고 나면 매트에 드러누워 멍하니 벽을 바라보기도 했다. 주중에 하는 클라이밍은 내 몸의 에너지를 소모했지만, 정신적인 에너지를 채워주는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피트니스 클럽과 달리 주변에서 운동하는 스위스 로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어, 메마른 소셜 갈증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래 다니던 Grimper 클라이밍장은 집에서 버스로 50분 가까이 걸려, 한국에 있을 때처럼 자주 갈 수 없었다. 몸과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차에, 집에서 도보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볼더링장이 새로 생긴다니!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아, 이제 내게도 가까운 숨 쉴 곳이 생기는구나.’
새로운 클라이밍장은 철길 옆에 지어졌다. 이름은 Le Hanger, ‘‘’ 창고’’라는 의미다. 나와 친구들은 ‘’ 르 헹거’’라고 불렀다. 외관은 창고같이 생겼으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드톤의 멋진 바와 모던한 스타일의 테이블과 소파들이 놓여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 위스키 등을 마시기도 했다. 이국적인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이 공간을 가로질러 가면, 클라이밍장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 300평의 탁 트인 공간에 볼더링 월, 개인운동 공간, 킬터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매우 쾌적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내 맘이 두근거렸다.
‘와, 진짜 재밌겠다!’
나는 르 헹거를 랩 메이트 P와 함께 자주 다녔다. P는 오스트리아 친구로, 10대 때부터 클라이밍을 해왔다고 했다. 볼더링장은 물론 매트를 짊어지고 자연 암벽을 다녔을 만큼 경험이 깊었다. 그래서인지 실력도 뛰어났다. 요즘 표현으로 ‘찐 고인 물’이었다.
그가 처음 랩에 합류했을 때, 취미가 클라이밍이라는 말을 듣자 반가운 마음에 얼싸안았던 기억이 있다. (진짜 기뻐서 그랬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아마도 드디어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랩 사람들은 모두 스위스 외의 나라에서 왔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대부분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겹치는 취미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연구 외에 함께 어울리며 우정을 쌓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도 가끔 클라이밍을 권하긴 했지만, 이 운동이 처음엔 접근성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몇 번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부러 같이 컴퓨터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하루 대부분을 랩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허무함과 피곤함이 쌓이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집 근처에 클라이밍장이 생기고, 클라이밍을 즐기는 랩메이트를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반가웠다.
우리는 랩에서는 연구와 대화를 나누고, 퇴근 후에는 함께 클라이밍장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주로 그와 다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과 건물 주변의 다른 연구기관 사람들도 클라이밍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알게 되었고, 같이 운동하며 친해졌다. 나중에는 서로의 졸업 디펜스에도 참석할 만큼 가까워졌다. 클라이밍 덕분에 내 생활은 한층 더 풍성해졌다.
르 헹거(Le Hanger)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스위스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영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 중국인, 타지키스탄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스위스에서 클라이밍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들과의 대화는 내 스위스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과의 교류는 내 사고의 폭을 넓히고,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인생에서 깊이 고민해봐야 할 주제들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르 헹거는 단순한 클라이밍장이 아니라, 낯선 나라에서 나를 숨 쉬게 해 준 소중한 안식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