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은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로 나라가 뒤덮이던 때였다. 그 말을 누군가는 비웃어 넘겼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지난 개, 돼지 망언을 떠올리며 분노에 휩싸였 수도 있다. 허나, 이는 단순히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공주님의 비상식적인 말로 치부하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지독히도 씁쓸한 사실은,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현실을 날것으로 목격했을 때는 파리에서 머물렀던 여름날이었다. 그때 만났던 중국인 언니는 어디서 들어는 봄직한, 하지만 결코 본 적은 없던 그런 류의 사람들이었다. 집에 헬리콥터를 가진(심지어 가지고 싶냐도 묻는 것도 서슴지 않아하는), 말하자면 경제적 상류층 말이다.(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그건 중국 기준에서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 카더라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그것이 정말 실재함을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거대한 일이다. 그건 작게는 한 사람의 생각을, 크게는 지금까지의 온 삶을 지탱해 주었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다. 어중이떠중이로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지는 그런 상대가 아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 놓인 어마어마한 장벽. 그 닿을 수 없음을 체감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그 사소한 차이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샌드위치 하나가 12만 원, 감자튀김 하나가 8만 원. 한 끼 식사가 60만 원, 유로전 티켓 150만 원.. 모든 것이 상상 그 이상으로 돌아가는 그곳. 그들이 우리를, 우리가 그들을 어찌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애초에 저들의 세상과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은 다른 거다. 다른 세계인 거다
어쩌다가 시작된 돈 이야기
나: 돈이 다가 아니잖아!
언: 아니, 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해!
나: (조금 당황) 왜?
언: 돈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나:.. 하지만 그건 너의 부모님 돈이지 네 돈이 아니잖아!
언: 왜? 내 부모님의 돈이 내 돈이지.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고, 난 형제도 없으니 모두 내 돈이지. 생각해 봐. 난 쇼핑을 좋아해. 하지만 내 강사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으론 내가 사고 싶은 가방을 살 수 없어. 그러니 부모님 돈을 써야지.
언니는 럭셔리 매니지먼트를 전공했다.
나: 근데 럭셔리가 항상 비싼 건 아니지 않아?
언: 아니. 럭셔리 언제나 비싸야 해. 그래야 희소성이 있지. 싼 건 럭셔리가 아니야. 아무나 살 수 없는, 그게 럭셔리야.
(충격으로 잊혔는지 이외의 다른 대화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쨌든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듣기에는 조금 무례하고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그 말들을 향해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비단 경제적 자본 만이 아니었다. 감자튀김 따위가 왜 그렇게 비싸냐는 내 물음에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이 감자튀김만 먹는 게 아니라, 이게 담긴 접시 이곳의 분위기와 건축물을 즐기는 거야." 그들이 공기를 마시듯 자연스레 섭렵해온 문화적 자본은 단순히 부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진짜 차이였다.
돈으로 사람의 품위를 결정지을 수는 없는 거라 생각했다.
돈으로 사람의 계급을 나눌 수는 없는 거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그 생각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래야 안 할 수가 없는 수준의 문제였다.
결국 우리 둘 사이엔 상당히, 아니 아마 넘을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과 나는 너무나도 다른 두 층위에 놓여 있었다. 서로의 환경에서 다시 태어나보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하기도, 이해할 수도 없는.
하지만, 동시에 만약에 내가 언니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나는 무어라 말했을까? 어쩌면 나도.. 정말 당연한 이치라는 듯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다른 이들 앞에서 저리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서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설마 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외면해 왔었다. 믿고 싶지 않았으니까. 드라마나 영화 속 이야기로 남겨 두려고 했다.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TV 속 인물들은 결국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인간의 사고 형성에는 그가 살아온 환경의 영향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을 거란 두려움을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지금 나는 이 기울어진 땅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땅은 그다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눈앞의 현실을 더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부터가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