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년간 일기를 써올 수 있었던 방법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가 동경하는 행위이자 다짐하는 목표였다. 관심사가 많고 몽상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성향 때문인지 항시 끝맺음을 맺어야 한다는 강박이 뒤따라온다. 올해의 다짐 중 하나도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내기'였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일기 쓰기'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때부터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니 더 이상 내 일상에 대한 간섭이 사라졌다. 누구도 나를 하나하나 봐주거나 시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깨우는 이도, 숙제해오라고 다그치는 이도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알아가야 했다.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그래서 다시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일기를 쓰는 동안만큼은 나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기록했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나와 내 상황을 대상화 함으로써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쓰는 것
일기만큼은 아날로그와 거리가 멀다. 손때와 시간의 흔적도 중요하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기록의 도구는 반드시 '모바일' 호환이 가능해야 한다. 물론 첫 2년 동안 쓴 다이어리에는 그때만의 감성이 뭍어나 애틋함이 있다. 하지만 보다 텍스트 집중적인 방식은 메모 어플이 아닐까 싶다. 5년 동안 솜노트를 쓰다가 애플메모와 노션을 거쳐 현재는 에버노트에 정착하여 3년째 애용 중이다. 주 일기장이 에버노트 일뿐 사실 일상을 기록하는 데에는 애플메모, 노션, 브런치, 인스타그램, 구글캘린더 등을 모두 사용한다. (사실 모두 노션으로 통합하고 싶었으나 블록 단위의 노션은 텍스트 작업에 적합하지 않았다)
1) 어플 별 용도
에버노트: 주 일기장으로 사용하며 '일자별'로 기록한다.
애플메모: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한 주제나 불시에 생각나는 간단한 메모를 하며 '주제별'로 기록한다.
노션: 일별, 주별, 프로젝트별 스케줄 관리를 목적으로 사용한다.
인스타그램: 주로 일상에서 짧은 생각과 리뷰들을 적는다.
브런치: 특정 주제로 짜인 긴 글을 쓴다.
2) 에버노트 장점
빠른 검색: 가장 많이 쓰는 기능으로 분기별, 연도별 정리를 하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작성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홈파밍'을 검색하면 이에 관한 내용이 담긴 모든 기록이 나올 뿐만 아니라, 사진 내의 단어까지 인식해서 나온다.
계층 UI: 솜노트나 노션의 경우 페이지 하나하나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반면 에버노트는 계층 보기가 가능해서 글을 쓰면서도 다른 기록들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업로드: 일기와 함께 매일 그날을 대표하는 사진을 함께 업로드해둔다. 후에 목록의 사진들을 간단히 스킴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상기할 수 있어 좋다.
에버노트의 많은 기능들 중에 사용하는 것은 몇 없다. 사실 일기장에는 간단하고 가벼운 게 최고다.
모든 기록은 의미가 있다.
일기에 대한 내 지침은 이렇다. "모든 기록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쓴다. 지난 10년을 매일 기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1) 쓰는 시간 - 하루 내내
대개 일기는 하루를 정리하는 의미로 잠들기 전 밤에 쓰곤 한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퇴색되고 미화되기 마련이라 생각보다 하루를 모두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에버노트를 열고 날짜를 적는다. 그 후 매시간 기록해두고 싶은 생각이 날 때마다 바로바로 어플을 열고 쓴다. (메모 어플의 최대 강점이 드러나는 부분) 그래서 내 일기를 보면 대부분이 과거 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쓰여 있다. 이렇게 기록하면 하루 내에서도 변화하는 내 기분과 생각의 흐름이 그대로 보인다.
2) 쓰는 내용 - 생각나는 모든 것
하루 내 있었던 일이나 사건을 그대로 적어 옮길 때도 있고, 소비한 콘텐츠, 떠오른 기억과 파생되는 기억들을 생각나는 대로 여과 없이 적어 둔다.
현상보다는 감상 위주로 쓴다. 일기란 결국 한 발짝 멀어져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도구다. 나 자신 안에만 갇혀 얽혀있는 생각을 글로서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보는 게 목적이다.
최소한 한 줄, 아니 한 단어, 한 장의 사진이라도 기록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글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과 생각을 떠올리게 할 트리거가 되는 무엇인가'다.
최대한 솔직하게 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안 좋은 기억과 생각은 필터링을 거쳐 온화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순간의 내 감정이 어떠했는지,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를 놓칠 수 있다.
한 해가 끝나는 자락에는 지난 일기를 훑어보며 연말 정리를 한다. 사실 하루하루의 나는 불안하고 자주 흔들리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또 어떤 날은 '나 따위가 뭐라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흐름 위에서 종종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1년의 시간으로 보면 꽤 많은 것을 이룬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일기들을 다시 엮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1) 연말 정리
1년 동안 여러 날에 걸쳐 흩어져있는 파편들을 다시 보며 그 안에서 흐름과 패턴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의미 없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해석함으로써 유의미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 해를 돌아본 후에 다음 연도의 방향을 정한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원동력을 얻는 시간이라 12월 말이 되면 빠짐없이 하는 일이다.
2) 브런치북
몇 개의 연말 정리가 모이면 브런치북으로 엮어낸다. 개인적으로 브런치의 매거진 포맷으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적인 기록을 공적인 기록으로 옮겨내는 작업이기도 해서 조금 더 완성도에 신경을 쓴다. 지나치게 추상적인 부분들에는 구체적인 첨언이나 자료를 더하는 방식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10년간 나를 가장 지지해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일기'였다. 확신이 없어도 계속해서 실해하고 이를 기록해 나간다면 그 자체로 점점 이야기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려줬다. 1년이 3년이 되면서 눈에 보이는 스스로의 성장을 발견했고, 3년이 6년이 되면서 스스로의 행동과 선택에 있어 일정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기 쓰기'가 가진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