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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우닝 Jun 03. 2024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사표 한 장은 품고 다닐 것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그만둘라치면 다른 학원이라고 다를까 생각이 들고 , 새로운 곳에 가서 또 배우고 적응할 것을 생각하니  아득하고, 다른 학원을 알아보며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도 귀찮게 느껴졌다. 틈만 나면 불평불만이었지만 매달 통장에 꽂히는 조촐한 월급은  그 조촐함에도 불구하고  마약 같은 힘이 있었고.


학원이란 곳을 직장으로 두며 힘든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식사를 여유롭게 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다는 점. 일반 회사를 다닐 때는 그래도 바쁜 일이 있어서 급할 때를 빼놓고는 1시간이란 점심시간을 점심도 먹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데 학원은 쉽지 않았다. 이 학원은. 2시부터 10시까지 근무이므로 점심은 먹고 출근하지만 저녁은 근무시간 중에 해결해야 한다. 안 먹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근무 중  휴게시간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프런트데스크에 앉아서 계속 오는 전화를 받고 내방 학부모들을 맞아야 하므로.  


저녁은 다른 직원과 교대로 후다닥 먹고 바로 자리로 복귀해야 한다. 저녁을 몇 분 안에 먹어야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없지만 교대를 해야 하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계속 들이닥치니 마음은 바빠질 수 밖에 없다. 이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더 힘든 것은 주말 중 하루는 꼭 출근해야 하고  휴가를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달력의 빨간 날인 공휴일도 선택적으로 쉬고- 설 연휴가 3일이라면 설 당일만 쉰다던가 - 월차나 연차를 쓰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학원은 거의 매일 문을 여고 누군가는 거기에 있어야 하니까.


이런 근무조건에서 여행과 쉼에 대한 아쉬움은 늘 있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도 여행 한 번 가기 힘든 시스템이니 뭐 하려고 이러고 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2019년 초 아이가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2019년  여름, 미국 학제로서는 1학기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갈 것이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아이가 대학에 합격한 시점에는 남편이 그다음 해 2월까지 출장을 가 있는 상태라서 이렇다 할 만한 가족여행도 가보지 못 하고 대입합격의 해를 그냥 넘겼다. 사실 아이가 대입을 마치면 기념으로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고 이를 이루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제 기회가 온 걸까? 아이가 미국에 교환학생을 갈 때 가족이 다 같이 미국에 가는 것! 여행도 하고 아이의 미국 정착도 돕고! 남편의 아이디어였다.


안 그래도 학원 일에 대한 불만이 여러 가지로 쌓여 있는데 울고 싶은 데 뺨 때리는 격으로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참에 정말 그만둘까? 아니다 우선 방법을 찾아보자.  미국여행을 가려면  2주 정도는 시간을 내야 하는데 일단 휴가를 요청해 볼까? 무급휴가라도.  그러면 다른 직원분이 2주 동안 계속 혼자 일해야 하는데 너무 부담을 주는 거 아닌가... 학원의 사정상 불가능하겠지....


가족과 같이 움직이려면 퇴사가 답이지 싶었다.  그래도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실행하려니 망설여졌다. 하지만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야 나를 대체할 인력을 뽑을 수 있을 테니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원장에게 가서 이야기했다.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원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무슨 이야기할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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