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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우닝 Jun 10. 2024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원장실에서 원장과 독대한 후 퇴사 의사를 밝혔다. 순수히 퇴직의사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원장은 이유를 물어보며 나를 붙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난 다시 한번 그만두겠다고 확실히 이야기했다. 원장은 구인공고를 냈다. 사람을 뽑는 과정과 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난 나의 목표인 퇴사를 이루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 늘 느낀다. 입사보다 어려운 것이 퇴사라고. 여건이 좋은 회사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직원이 일당백을 해내야 하는 회사일수록 떠나기는 쉽지 않다.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떠나면 마냥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많은 노력을 들였던 곳이라 그만두려니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다 얻을 수 없으니 더 중요한 걸 선택하는 수밖에.  2020년 2월 경에 한국에 코로나가 시작되어 3년 정도 발이 묶인 걸 생각하면 이때의 가족여행은 잘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두고두고 꺼내 보는 소중한 사진첩 같은 추억이 되었고.


그 해 여름 아이의 교환학생출국길에 가족이 동참하여 미국여행을 했다.  여행은 즐거웠으나 여행 경로나 강도를 두고 남편과 나는 종종 의견이 달라서 언쟁이 오가곤 했다. 각자의 생활을 하던 가족구성원들이 24시간을 같이 붙어 다니며 여행을 다니려니 소소한 마찰도 있었고. 그럼에도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막상 아이를 혼자 미국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혈혈단신 유학까지 가는 학생들도 많은데 이쯤에서 약한  마음은 떨쳐내자 싶어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아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고 집안이 더 텅 빈 듯했다.  미국과의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나는 구직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원을 하기 전에 이번 구직 활동의 지침을 세웠다.  주말에는 온전히 쉴 수 있는 곳, 가급적 영어과목으로 그리고 아침에 일찍 나가더라도 저녁이 있는 삶을 되찾자. 영어는 좋아하고 관심이 많지만 수학은 잘 모르는 분야라 늘 자신이 없었다. 아이도 이과생이 아니었으니까 더더욱.  오후 2시까지 출근해서 10시까지 퇴근하는 이전 학원의 출퇴근시간에도 장점은 있지만 밤10시까지 일하는 것은 힘들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자꾸 야식을 먹게 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2곳의 학원근무 경력이 생겼지만 이번에도 구직은 쉽지 않았다. 내가 찾는 조건의 일자리를 기다려야 했다. 일주일에 요일을 정해놓고 구직사이트에 들어가 새로 올라온 구인공고를 검색했고 원하는 곳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한 달이 좀 넘었을까... 영어 학원 두 곳에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두 곳 다  유치부와 초등부가 같이 있는 프랜차이즈 영어학원이었고 주 5일 근무, 저녁  때면  퇴근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면접을 본 A사와  B사 중에는 B사가 더 좋았다. 집에서도 더 가깝고 업무환경도 더 안정되어 보였다. 그러나 B사에서는 연락이 없었고 A사에서는 면접 후 며칠 안 돼서 출근하라는 전화가 왔다.


B사에 전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구질구질해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자체적으로 마음을 접고 A사로 출근했다.

그런데 A사에 출근하고 보니 학원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홀로 너무 막막했다. 안 그래도 면접을 볼 때 인수인계해줄 전임자가 없어서 면접을 본 교수부장이 자신이 일을 가르쳐주겠다고는 말했지만 교수부장 본인도 바쁜 데다가 전임자의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았다.


출근 첫날부터 멍하니 혼자 앉아있어야 했다. 책상에 있던 업무파일을 펴보고 어떻게든 일을 파악하고 시간을 보내보려 했지만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뻘쭘하게 앉아있는 이 상황이 참 아득했다. 당장 내일이 그려지지 않았다. 직전 직장일이 생각났다. 첫 단추부터 잘 안 잠가지는 옷은 입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하고 속상했지만 불현듯 생각났다 "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일본드라마 제목이. 교수부장에게  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죄송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임자도 없는 상태에서 제가 이 일을 배워서 해나가기가 힘들겠다 , 다른 사람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출근 첫날 바로 그만두다니. 이런 적은 지금껏 없었는데..... 씁쓸한 자괴감을 느끼며 학원 문을 열고 나오는데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바로 내가 기다리던 B사의 전화였다!!! 연락이 늦었다며, 혹시 다른 곳에 취직하신 거 아니냐,  아니시면 10월부터 출근가능겠냐고 물어왔다.


너무 기뻤다. 학원 위치도 집에서 가까워서 좋았고 내가 일하고 싶던 영어학원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래 과감히 나오기를 잘했어!!! 그렇게 미국에서 돌아온 지 약 두 달 후에 다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누구의 소개도 아닌, 내가 지원해서 내가 원하는 직장에 합격했다는 마음에 참 뿌듯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강사도 아니요, 그냥 프런트데스크 직원이겠지만 그때는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 붙은 것만큼이나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었다. 학원이라는 업종에 도전해서 경력을 쌓았고 그것을 인정받아서 이제 내가 바라던 조건에 맞는 일을 찾았다고!  그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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