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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Apr 26. 2020

72. 내가 하면 벤치마킹, 남이 보면 카피

<내가 하면 벤치마킹, 남이 보면 카피 >


나는 카페를 운영하는데 생각보다 SNS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운영시간부터 시작해서 카페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안내까지. 손님들은 엄지손가락 하나로 정보를 받고, 서비스를 신청하고 이용하곤 한다.

찾아오기도 힘든 구석진 동네에 있는 카페일 뿐이지만, 온라인을 통해서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 익명의 손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문의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프로필 사진도 없고, 게시글도 없고, 팔로워도 없어서 그 손님의 정체를 가늠하기가 참 어렵다.

한 번쯤은 카페에 왔던 손님이던가? 단골손님인가? 아니면 이번에 한번 와보려고 하는 손님인 걸까?


그 손님과의 첫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최근에 나는 카페 전용 텀블러를 제작했다. 나만의 카페를 브랜드화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든 텀블러를 내가 갖고 싶었다. 그 손님은 메시지를 보내온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애매한 카페에서 텀블러를 제작했던데 뚜껑 쪽 상세 사진을 보여줄 수 있으신가요?" 

아, 텀블러를 구매하고 싶으신가 보다. 열심히 입구 쪽 사진을 찍어서 보내본다.

"윗면이 빨대를 바로 꽂을 수 있도록 되어있어요. 제일 좋은 건, 빨대 없이 바로 호록 호록 마실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답니다" 구매하실 건가? 정보가 부족한가? 답을 기다려보지만, 손님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카페의 수익을 올리는 방법으로 '동호회 활동'을 선택했다. 영어 스터디며, 독서모임이며 등등 여러 모임을 구상하고 기획했다. 진행방법부터 모임을 위한 온갖 자료들까지 만들었다. 여러 번 시뮬레이션 끝에 운영방식, 시간, 절차 등도 세부적으로 정했다. 나는 여러 가지 스터디 자료를 준비하고, 모임을 구성하고 운영하고 진행하는 대신 멤버들은 음료 한 잔 값만 지불하면 된다. 이 모든 계획 끝에 나는 SNS에 동호회 멤버를 모집한다고 글을 올렸다. 얼마 후 그 익명의 손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스터디 관심 있어요! 정보 좀 주세요! 어떻게 운영되는 거죠? 자료는 어떤 걸로 주시는 거죠?"

나는 구구절절 설명했다. 이해를 돕고자 여러 예시도 들면서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그 익명의 손님은 익명성 뒤로 숨은 채 답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카페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이벤트며, 서비스 등등을 물어온다. 일방적으로 질문만 던지고 가는 그 손님에게 나름 친절하게 답변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미치겠다. 정말 손님인 건지 아니면 무언가 목적이 있는 사람인 건지. 그 손님을 추적해보려고 해도, 나는 그 손님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 이름도, 생김새도, 사는 지역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어떠한 티끌만 한 정보도 없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우리 카페와 비슷하게 모임을 구성하고, 공지글을 올리는 한 카페 SNS를 발견했다. '내가 준비했던 것들이 그저 특색 없이 무난한 것일지 모른다', '그저 우연히 비슷한 콘셉트로 글을 올린 것뿐이겠지'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우연이 겹치면, 의심은 깊어지고, 깊은 의심은 확신이 되어간다. 문제는 이러한 카피에 대해서 '비슷하다'라고 말하기 애매하다는 거다. 물건도 아닌 카페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서 비슷하다고 비난하기 어렵다는 거다. 무엇보다도 괜히 스트레스받고, 지치고 힘든 건 나뿐이라는 거다.


똑같이 안 하고 그저 '비슷'하다고 해서, 카피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만.


나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래, 애매하게 카피할 수 없도록, 완전 나만의 특색을 잔뜩 묻혀보자.'

사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할 테다. 휴. 어쩌지하고 걱정만 늘여놓는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인간이 저지른 자원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지구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사람들은 나비, 나방을 뜻하는 '파피용'을 지칭하는 거대한 우주함선을 만들어 지구를 탈출하고자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세 가지 적과 맞서게 되지.
첫 번째는 그 시도와 정반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두 번째는 똑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지.
세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는 않으면서 일체의 변화와 독창적인 시도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다수의 사람들이지.
세 번째 부류가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고,
또 가장 악착같이 달려들어 자네의 프로젝트를 방해할 걸세 -파피용 中

회사에 다닐 때는 내가 무언가 시도하려 하거든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 '작년과 동일하게만 하자',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들과 항상 부딪혔다. 아무런 변화 없이, 무난하게 가자는 팀장님과는 매일이 전쟁이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흘러가는 흐름에 맞춰 사업을 바꿔보고 새롭게 기획해봐도 번번이 퇴짜 맞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의 내 상황은 다르지 않는가. 내가 진행하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도,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 지금 내게는 한 명의 적만 있을 뿐이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하면 나만 손해지. 그 익명의 손님(인지 모를 사람) 덕분에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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