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매한 인간 Feb 08. 2019

12. 계절을 느끼다 上, 下

나의 직딩시절 소심한 꿈, 접촉사고 후 한 두 달 병가 내기.

<계절을 느끼다 上, 下>



1. 계절을 느끼다 上

오늘 카페로의 출근길은 참 기분 좋다. 추위가 한풀 꺾여 따스하다. 입고 온 패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회사 다닐 때는 하루의 날씨를 모르고 살았다. 해뜨기 전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날의 날씨는 거의 알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더 그랬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적당히 맞고 뛰어다녔다. 아니면 혹시 우산을 들고 온 동료의 우산을 나눠 쓰곤 했다. 에어컨을 틀어줘서 약간 쌀쌀한 사무실, 난방을 틀어줘서 약간 훈훈한 사무실. 적당한 온도의 사무실은 계절을 잊게 했다. 옷장에는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적당한 옷으로 가득하다. 지금은 온전한 계절을 느끼고 있다. 눈, 비, 바람, 서리, 새벽이슬, 태풍, 햇빛- 모든 계절을 새로이 경험하는 중이다.


2. 계절을 느끼다 下

백미러를 살짝 보니 뒷좌석과 트렁크에 짐이 한가득이다. 10평이 조금 안 되는 카페 안에는 별도의 창고가 없다. 깨끗하게 삶아온 행주, 종이컵, 냅킨, 빨대, 컵홀더, 청소도구 등등- 차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기특해 죽겠다. '차 없으면 저 많은 짐들을 다 어쩌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쾅!!!!

.

.

.

.

정신을 차려보니 구급대원과 경찰이 보인다. 주변이 웅웅 거리고 머리가 울린다. 내 입은 자동으로 '괜찮다'고만 반복한다. 흔들리는 머리를 짚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문이 안 열린다. 구급대원이 반대편으로 내리라고 문을 열어준다. 정신없이 내리고 경찰을 따라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상황을 들어보니 좌회전을 하다가 직진 차량과 충돌했다고 한다. 평소 그 길은 신호가 없어서 사고가 잦은 곳이란다. 뒤를 돌아보니 카페가 있는 건물이 보인다. 코앞에서 사고가 났다니 미치겠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지?' 나는 부랴부랴 시계를 봤다. 오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한 시간 일찍 오긴 했지만 마무리하고 가면 좀 늦을 것 같다. 어쩌지-


카페를 오픈하기 전 스스로 다짐했다. 오픈 시간과 마감 시간은 손님과의 약속이니 꼭 지키자고- 지난번 맛집을 찾아 한 시간 거리를 갔는데, 휴무일이라고 해서 얼마나 화를 냈던가.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다. 인명사고도 없다. 유리창에 사정없이 머리를 처박힌 것 같지만 견딜만하다. 나는 차를 견인해주시는 기사님께 부탁했다. 차에 중요한 짐이 많아서 그런데 저 앞 가게까지만 차를 끌어줄 수 있냐고 애절하게 부탁했다. 기사님이 흔쾌히 도와주신 덕분에 카페 앞에 모든 짐을 내렸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찌그러진 차를 본 경비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뛰어온다. 자초지종을 듣게 된 경비아저씨의 배려 덕분에 짐을 잠시 보관할 수 있게 됐다. 정말 다행이다.


오픈 시간이 되자 손님 두 분이 오신다. 손님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게 참 안심됐다. 커피를 내리는데 골이 흔들린다. 몸에 열도 오르는 것 같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두개골이 깨질 듯이 아픈데도 손님에게 건강하고, 밝게 보이고자 무던히 애썼다. 그렇게 나는 카페에서 13시간을 버텼다. 청소까지 깔끔하게 끝내고 퇴근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미련 곰탱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하늘을 오를 만큼 가볍다. 


회사 다닐 때는 교통사고를 기다렸다. 차에 치여서 한두 달 병가를 내는 게 소심한 희망이었다. 회사 동기들과 모여 점심을 먹으러 갈 때, 우스갯소리로 '횡단보도 건너다가 가볍게 치였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했었다. 가끔 몸이 안 좋을 때가 있긴 했다. 독감이라던가 몸살이라던가- 그럴 땐 원래 아픈 것보다 두배, 세배로 아픈 척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알아달라고 떼썼다. 나는 이렇게 책임감이 강하니 연말 평가 점수는 잘 좀 달라고 시위했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지금의 나에게는 나를 평가할 팀장도, 평가제도도 없다. 오직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만 있을 뿐이다. 매일이 기대된다. 오늘은 어떤 손님을 만날까, 어떤 재밌는 일이 있을까 궁금하다. 계절을 읊조리게 된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따뜻해졌구나', '와! 새해 첫 눈이네!', '비가 왔는데 진눈깨비로 바뀌었네!'

앞으로를 기도하게 된다. 아프지 않길, 건강하길, 아무 사고 없길, 나 자신이 행복하길-  앞으로도 온전한 계절을 느끼고 싶다. 눈, 비, 바람, 서리, 새벽이슬, 태풍, 햇빛- 모든 계절을 온몸으로 알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11. 애매한 평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