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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05. 2021

저 아직 폐업 안했어요!

임대차 계약 재갱신했습니다!


애매한 인간

공공기관 정규직 4년 경력

가진돈 퇴직금 포함 3천만 원

그 외 다른 능력, 가진 것 없음

(한 줄 추가) 애매한 카페 2년 4개월째 운영 중


애매한 카페를 오픈하고, 2년 4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무려 2년 4개월!

직장에서 1년, 3년, 5년마다 퇴사 욕구가 솟구친다는 '1,3,5 법칙'이 있듯, 자영업의 세계에서는 '1,2 법칙'이 있다. 1년 안에 폐업하면 빠른 선택이고, 2년 안에 폐업하면 그래도 잘 버틴 것이다(이런 고민이 전혀 없으면 대박 난 집). 상가임대차 계약도 대부분 2년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2년이 앞으로 계속 자영업을 할 것인가, 그만두고 다른 길로 갈 것인가 결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마의 2년을 넘어섰다. 카페를 창업하고나서부터 2년 동안 나 스스로에게 자괴감에 가까운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임대차 계약이 다가올 때에는 이틀에 하루만 잘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갱신 일자가 다가올수록 고뇌는 더 커졌고, 낮이고 밤이고 심장이 긴장감에 휩싸여 정신적으로도 피로했다.

'카페에서 전문성이 생기면 얼마나 생기겠냐, 앞으로 남은 인생 뭐해먹고 사냐'

'동네 카페에서 하루에 커피 몇 잔이냐 팔겠냐, 인건비도 안 남는데'

'앞으로 더 예쁜 카페들은 계속 생기는데, 인테리어는 고만고만한 너네 카페가 어떻게 버티겠냐'

'카페를 운영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 생길 기회비용을 날려버릴 거냐'

거의 두 달 가까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혹사시켜서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 이 길을 계속 가보자'


처음 카페를 창업할 때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로망'이 컸던 것 같다. 뭐든 애매하게 하는 나라서, 특출 나게 잘하는 그 능력이 하나 없어서, 뭐든 고만고만하게 하는 나라서. 그 와중에 커피는 좋아서. 그래서 카페를 차렸던 것 같다. 하지만 나 스스로 2년이 넘으니 '카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카페는 이제 단순히 커피를 사고, 팔고, 마시는 공간이 아니다. 커피는 매개체일 뿐, 커피를 통해서 손님을 만나고, 손님들과 정과 추억을 쌓고, 그렇게 점차 동네의 사랑방이 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게 돼버렸다. 손님들이 나를 그렇게 믿게 만들어버렸다.


차 타고 1시간이나 와야 하는 거리에서도 주기적으로 찾는 손님, 취준생으로 만나서 이제 당당한 사회인이 된 손님, 매일 대충 점심 때우는 나를 위해 주전부리를 날라주는 손님, 심심해서 시작한 독서모임을 함께하게 된 손님. 이 외에도 내 일상을 수없이 흔들고, 반짝이게 만들어주었던 손님들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애매한 카페는 더 이상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동네 사랑방이 되어버렸다고. 그러니 우리를 믿고 임대차 갱신 계약서에 도장 찍으라고.


지금 애매한 카페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여전한 점은 코끝을 감도는 잔잔한 커피 향이랄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피 향이 먼저 나를 감싼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한쪽 벽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 진열되어있다. 반대편에는 물감이며 붓이며 온갖 잡다한 취미용품들이 이리저리 늘어져있다(엄마가 만들어준 때수건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손님들과 시작한 취미생활이 모임이 되었고, 모임이 커져 동아리가 되었다. 이제 나는 이 시간부로 '애매한 카페'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동네 사랑방'으로 개명한다. 땅땅땅.


https://brunch.co.kr/@aemae-human/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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