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날이 떠오른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으나,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 못 들던 그날 말이다. 어느 날은 두 시간만 자고, 어느 날은 꼬박 밤을 지새워 인테리어와 메뉴를 고민했다. 그 과정은 피곤하지만 꽤나 즐거웠다. 계획했던 것을 하나 둘 실행에 옮길 때는, 통장이 비워가는 만큼 상가는 채워지는 재미가 있었다. 이런저런 인테리어 계획 중 하나는 바로 벽 하나를 통째로 책의 선반으로 만드는 거였는데, 사실 기가 막힌 계획이었다. 선반이 책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벽에 매달려 있기 위해서는 선반 하나에 못을 10개 정도 박아야 했다. 그리고 벽 전체를 덮기 위해서는 선반 20개가 필요했다. 즉, 내가 계획한 인테리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못을 200개를 박아야 했단 말이다.
나는 내 머릿속에 상상된 인테리어 완성본 그림을 대강 스케치해서 아빠에게 넘겼다. 도면도 아니라 치수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는 그냥 막대기만 죽죽 그려져 있는 그런 그림을 말이다. 이런 나의 막무가내에도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상상을 현실로 바꿔주었다. 선반의 길이를 재고, 벽의 길이를 재고, 간격을 가늠하고 못을 박았다. 뒤에서 관리감독만 하는 딸을 두고 혼자서 선반을 달았다. 못 200개를 이용해서.
그렇게 카페&서점을 연지 4년 차, 세월이 흐른 만큼 선반에는 판매되지 못한 책들이 쌓여갔고, 책의 종류와 권수도 늘었다. 그리고 오늘, 선반 두어 개가 무너져 내리려고 하고 있다. 못 10개의 힘으로 벽에 단단하게 붙어있던 선반 두어 개가 기울어지고 있다. 책들이 조금씩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 앗! 책이 무너진다, 무너져! 내 손은 자동으로 아빠를 호출했다. 아빠는 나의 긴급 SOS를 듣고 한참을 웃더니, "이제 남편한테 부탁 좀 해봐라"라고 대답한다. '아, 남편이 있었지' 지금 와보니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을 정도로 아빠를 의지했는지 드러난 셈이다. 아빠가 있으면 뭐든 가능했고, 아빠만 있으면 상상은 현실이 됐다. 아빠가 있으면 '안될게 뭐 있어? 못할게 뭐 있어?'라는 순진무구한 자신감이 생긴다. 나에게 닥친 모든 긴급상황의 해결책은 아빠였다. 아빠만 있으면 뭐든 해결되었고, 아빠만 있으면 걱정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빠가 매일 저녁 연필을 깎아주었다. 딸이 예쁘게 글을 배우고, 글을 쓰기를 바라는 마음에 정말이지 예쁘고 뾰족하게 깎아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 되자 기차 모양의 연필 깎기가 등장했고, 이내 연필 깎기는 아빠의 역할을 대체했다. 그리고 아빠는 내게 목재를 깎아 책상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아빠가 만들어준 책상에서 책도 읽기도 했지만, 그 책상에 낙서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였던 것 같다. 결국 엉망진창 공주님 낙서에 도배된 책상은 버려지고, 가구 가게에서 사 온 책상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중학생이 되자 기술가정 시간에 바느질을 배웠다. 선생님은 배운 손바느질로 쿠션을 만들어오라고 하셨고, 나는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천과 쿠션 솜을 넘겼다. 아빠는 그날 재봉틀을 배워 재봉틀로 쿠션을 뚝딱 만들었고, 나의 수행평가 점수는 최하점을 받았다. 그 뒤로 여러 과제를 할 때도, 고3 수험생이 되어 등하교를 할 때도, 대학교에 가서 술퍼먹고 하교할 때도 아빠는 늘 내 곁에 있어주었다.
아빠는 아빠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을 익혔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나에게 헌신했을까? 때론 연필 깎기 선수로, 때론 목수로, 때론 운전기사로, 때론 선생님이자 인생 선배로서, 아빠는 얼마나 많은 직업을 갖고 내게 다가왔던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아빠는 인테리어 기사로서, 수리공으로서, 카페 청소 아르바이트생으로서 늘 내 곁에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었던 아빠인데, 그런 아빠를 나는 아직 보내줄 준비가 안되어있다. 그래서.... 우리 카페&서점의 무너져내리는 선반은 6개월째 아직도 아무 수리 없이 버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아마도 완전히 무너져내려서야, 책이 우수수 다 떨어지고 말아서야 아빠를 보내줄 수 있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