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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r 08. 2022

38. 지옥에서 온 커피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과시한다. 문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쉴 새 없이 짤랑거린다. 매서운 바람은 손님들을 집 안에 꽁꽁 가둬두었다. 손님이 많아서 앉을 시간이 없을 때, 발바닥이 아픈지도 모른 체 손님을 맞았었다. 몰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을 때, 하나하나 주문을 쳐내며 행복감을 느꼈다. 장사를 하는 이에게는 바쁜 것이 행복임을, 손님은 이 행복을 전해주는 비둘기 같은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한산한 카페에 종소리만 요란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내 마음을 뒤흔드는지. 

'오후 5시, 아직 한 잔도 못 팔았네'


저녁 7시가 되자 단골손님이 입장했다. 2년 전 독서모임을 계기로 지금은 절친이 된 60대 손님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공대생. 사진을 찍으며 일상을 기록하는 예술가. '라떼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이자, 그래서 커피는 항상 라떼 대신 아메리카노로 마시는 손님. 손님과 함께한 2년의 세월은 세대를 뛰어넘어 절친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어느새 마음을 툭 터놓는 편안한 관계가 되어있었다.


"오늘도 따수운 아메리카노죠?"


늘 그렇듯 투샷이 들어간 아메리카노. 따뜻하면 안 되고 따수워야한다.


"지옥처럼 뜨겁게 해 줘요"


응? 지금 뭐라고?


"지옥처럼 뜨겁게, 악마처럼 검게 뜨스운 아메리카노를 내려주세요"


아니! 나는 4년간 카페를 운영하며 이렇게 멋들어진 주문은 처음 받아본다! 나는 손님을 앞에 두고 물개 박수를 친다. 목젖이 보여라 웃어제낀다. 손님도 이런 나의 반응을 보고 MZ세대를 웃겼다는 뿌듯함이 가득하다. 


"정말이지, 낭만적인 주문이네요. 평생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저 말 받아 적어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는 손님은 어디 책에서 봤다며 전해준다. 그리고 내가 까먹었을세라 다시 되풀이해서 말해준다.


"지옥처럼 뜨겁게, 악마처럼 검게"


그런 손님의 자상함에 나는 또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는다. 삐뚤빼뚤하게 적힌 손님의 대사를 다시금 읽고 또 읽는다. 나는 당장 커피머신 앞으로 달려가 증기기관차처럼 연기를 내뿜는 뜨거운 물을 뽑아낸다. 거기에 샷 두 개를 콸콸 넣는다. 


"지옥에서 온 커피 대령이요"


지옥에서 온 커피가 이렇게나 나를 행복하게 할 줄이야! 우리는 그렇게 오후 9시까지 내내 웃음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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