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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Jul 18. 2022

나는 죽음이 필요했다

초등학생 3학년 때의 나는 고민이 많은 아이 었다. '산다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가기 싫은 학교를 가야 했다. 일터에 새벽같이 나가는 아빠를 붙잡고 싶었고, 나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의 손을 움켜쥐고 싶었다. 학교라는 공간은 더욱 버거웠다. 지켜야 할 규칙은 왜 이렇게 많은지. 수업시간에는 왜 조용히 해야 할까? 화장실은 왜 쉬는 시간에만 가야 할까? 내 입으로 이야기를 하려면 왜 손을 들어야 할까? 쉬는 시간에 얌전히 앉아있기보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사교활동이 왜 중요한 걸까? 왜 반에 있는 모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할까? 성적도 내 맘 같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인내하고 참고 또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던가보다.


그때부터 나는 내 방의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 안에서 혼자 훌쩍였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때의 '나'라는 어린아이의 처절함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세상에 절망했는지 모른다. 이런 나의 고뇌의 흔적을 읽은 부모님은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등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집을 나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결심은 6시간 만에 깨지고 말았다. 집을 떠나 내가 갈 수 있는 장소는 놀이터밖에 없었다. 마실 물도, 먹을 식량도 없는 메마른 모래밭의 놀이터. 성인이 된 지금은 휴대폰과 신용카드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을 테지만. 하지만 어린날의 나는 돌아갈 곳이 집 밖에 없었고, 돌아갈 세상이 학교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때는 죽임이 왜 이렇게 경이롭게만 느껴지던지. 힘든 세상을 한 순간에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처럼 여겨졌던 거다. 하지만 이내 죽음의 깊이도 깨닫게 되었다. 나 한 사람의 죽음이 가족 모두를 슬픔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죽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 고통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엄마에게 찾아갔다. 엄마 옆에는 남동생도 앉아있었다. '남동생도 알아야 해'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내 말을 꺼냈다. "엄마. 죽고 싶은데, 엄마의 허락이 필요해요" 긴 침묵은 나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어서 결단이 필요했다. "엄마, 나 너무 죽고 싶어요" 엄마는 멍하니 고개를 내리고 신문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둘러 떨어지려는 그 무언가를 두 눈에 붙잡아두고자 애썼다. 


엄마는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었는지, 왜 죽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것도, 성적에 비관하는 것도, 가정이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삶이 버거웠고, 그게 힘들다고 느꼈을 뿐. 엄마는 그 말이 더 절망적으로 다가왔는지 또 이내 말을 잃었다. "정말 큰 이유가 아직은 없다면, 지금은 엄마랑 같이 살아보는 게 어떨까." 나는 엄마의 떨리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서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20여 년 전의 그때의 그 순간을 엄마는 기억할까? 


"그때? 심장이 얼마나 벌렁벌렁했는지! 하지만 이내 엄마랑 같이 거실에서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너를 보고 안심했지. 내 옆에서 누워서 씩 웃는 너를 보니, 다행히 큰일이 있는 건 아니었구나 안심했지. 죽음의 의미를 고민해보는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니 다 컸구나 생각했지. 그리고 이내 알았지. 어린아이들에게도 삶은 똑같이 힘들 수 있겠구나. 나에게 마냥 아기 같던 너도 고민이 깊은 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엄마는 이내 덧붙였다. "엄마가 된 너도, 네 아들에게 그 질문을 들으면 어떻게 대답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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