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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Jul 18. 2022

비 오는 날이 마법처럼 행복해진 날

오늘 같은 장마철에는 마음을 다잡고 출근해야 한다. 장사가 안될 것이라는 것, 한 명의 손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단단히.


오늘 우리 카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은 바로 남편이었다. 최근 레미콘 회사, 물류회사의 파업, 건설현장의 인건비 상승 등으로 건설현장이 올스탑 되었다. 프리랜서처럼 일하고 있는 내 남편에게는 정말 비극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파업이 언제 끝날까 하루에도 수십 번 인터넷 검색을 하고, 타설을 위해 레미콘 회사에 전화를 하고, 작업자분들께는 파업으로 인해 현장이 멈췄다고 전화를 돌린다. 전하는 소식마다 우중충하고 어두워서, 남편의 마음이 젖은 솜처럼 묵직이 가라앉는다. 남편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집에서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그 또한 나와 같은 과의 사람이구나.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일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개미의 전형적인 부류. 해도 해도 티 나지 않는 게 집안일이다. 해도 해도 쌓이는 게 집안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집안일을 다 해내버려, 끝내 고요히 침전했다. 나는 그런 그를 붙잡고 같이 카페&서점으로 출근했다. 직접 본인이 마실 커피를 내리게 하고, 책을 읽게 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불안해서 책에 집중을 못하는 그를 두고 노트북을 두들겨보라고 했다. 무료 강의를 듣든, 일기를 쓰든, 컴퓨터 게임을 해보든, 뭐든 타자기를 두들겨보라고 했다. 몇 번의 타닥타닥,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히 카페&서점의 분위기에 스며들어간다.


유리창을 투둑 투둑 건들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비를 바라본다. 그리고 함께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누려본다. 오롯이 즐겨본다. “오늘은 김밥과 라면 먹기에 딱인 날이네? 오늘 특별히 매장의 히든 메뉴인 컵라면을 내어주지” 소중한 식량을 내놓는 나를 보고 킥킥 웃더니, “김밥은 내가 사 올게”하고 대답한다. 우리의 티키타카는 투둑 투둑,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빗소리만큼이나 정겹다.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개미’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고,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개미의 삶도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부의 환경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는 정말 자그마해서 개미조차 되기가 어렵다. 그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감의 불씨로 온 가족을 불태우지 않는다. 걱정만 하며 하루를 버리지 않는다. 함께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잔잔한 음악을 듣고 웃음 짓는다. 세 줄짜리 김밥을 둘이서 갈라먹으며 ‘함께’ 하루를 보낸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공감하며, 서로를 달래준다.


잠시 후 네 시 이 십분 쯔음, 우리 아들이 카페&서점으로 하원했다. 아들은 오늘 샛노란 장화를 신고, 파아란 우산을 들었다. 아들은 비 오는 날을 제일 좋아한다. 내리는 빗소리가 경쾌했고, 빗길을 자박자박 걷는 게 행복했고, 물 웅덩이에 풍덩 발을 빠뜨리는 게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드는 비 오는 날은, 발과 손이 풍족한 날이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아들은 매우 실망했다. 기껏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갔는데 내리는 비를 단 한 방울도 맞지 못했다. 어린이집으로의 등원 길은 아파트 지하주차장을 이용했고, 하원길에는 선생님의 커다란 우산에 완벽 보호되었다. 우산은 내내 찍찍이의 잠금장치 아래 갇혀있었다. 아들은 우산에게도 비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산에게도 비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가게 문을 벌컥 박차고 나갔다. 우산에게 비를 맞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장화에게는 비가 만들어낸 웅덩이에서 수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이내 장화와 우산이 배불러 보이자, 모두 벗어던졌다. 장화도, 양말도, 우산도. 그리고 물 웅덩이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때론 물개가 되었고, 개구리도 되었다. 웅덩이는 아들이 만들어낸 파동으로 한없이 흔들렸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비, 아들의 손짓으로 인해 물결 지는 웅덩이, 회색빛의 구름들과 그 사이에서 내려오는 한줄기의 햇살. 남편과 내 어깨를 다독이는 빗줄기. 피부를 적시는 장마철의 습기. 들려오는 아이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 오감으로 남는 이 순간을 나와 남편은 앞으로 계속 꺼내어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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