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책과 함께하는 티키타카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어쩌다 한 번씩 낯선 것을 추구할 때가 있다. "오늘은 저녁 먹고 밖에 나가볼까?" 남편이 제안을 해오지만 썩 끌리지 않는다. 뭐? 밥 먹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설거지하고, 밀린 빨래를 개고, 청소기도 한 번 돌려야지. 그것만 있는 줄 알아?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도 챙기고, 식판도 설거지해서 가방에 넣어줘야 하잖아. 애기도 코코낸내하자고 말하면 그냥 냅다 자는 줄 아나? 재우는데도 시간이 걸린다고. 눈에서 초강력 레이저를 쏴대도 남편은 모르쇠다.
그렇게 저녁밥을 먹고 뛰쳐나온 거리를 무작정 걸어본다. 서늘한 바람이 콧구멍을 간질이니 상쾌하기도 하고, 오랜만의 산책에 건강을 챙기는듯한 느낌이 들어 몸이 가볍기도 하다. 그런데 마음만은 답답하다. 답답하다 못해 무언가 갑갑함마저 느껴진다. '할 일도 무진장 많은데' '무작정 걷는 것보다 좀 더 실용적인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 '장을 본다던가, 예쁜 카페에 가본다거나' '전시회를 가봐도 괜찮고' 이런 내 맘을 눈치챈 남편이 "우리 마트 들러서 장이나 볼까?"라고 말한다. 응. 좋지. 땡큐!
장 봐온 물건을 냉장고에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식재료보다 안주거리가 더 많다. 맥주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갑자기 마음의 공허가 확 다가온다.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저녁 식사 후에 맥주를 마셔야 한다. 남편과 좀 더 티키타카 대화를 나누려면 소주를 마셔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수다 자리에서도 맛있는 먹거리와 술이 있어야 한다. 술이 대화의 침묵과 여백을 채워주는 상황이 옳은 걸까? 맛있는 식당, 좋은 분위기의 카페,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전시회. 그것들이 정녕 나의 하루를 꽉 채워주는 걸까. 그것들이 주는 찰나의 행복과 기쁨, 그러한 감정들은 손쉽게 휘발되어버리는 법이다. 꽉 채워진 냉장고 앞에서 되려 마음의 허기를 느낀다. 남편과의 산책을 조금 더 소중히 생각할 것을. 그게 진정 실용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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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술과 여행, 취미에 돈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냐'라고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정말 행복해요. 우리는 나날이 더 많이 여행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물건을 사기 때문에 따분할 틈이 없어요" 이를 두고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하고 따분하고 소외감에 시달리는 인간은 강박적 소비로 불안을 보상한다. 인간은 공허함을 느끼고 이 허전함을 상징적으로 채우기 위해 다른 사물,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물로 자신을 채워 마음의 공허와 쇠약을 극복하려 한다. 요즘 사람들은 돈을 주고 필요가 없는 것은 애당초 즐길 수 없다고 믿는다. 그냥 앉아 있거나 걷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삶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없다면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기쁨의 개념이 사라져 가는 중이다"
먹고 마시고, 보고 느끼고 즐기는 소비적 경험만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돈을 그런데다 쓰는 게 맞는 것이고 실용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공허와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뫼비우스의 띠일 뿐이다. 실용성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지. 사회나 주변에서 정해놓은 정의가 아니라, 스스로 그 뜻을 재정의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내게 산책을 권유하는 남편, 그가 진정한 기쁨을 아는 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