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고백하건대 남편을 비롯한 어떠한 가족과도 이렇게 길게 통화해 본적이 없다. 나는 오늘 우리 서점의 단골손님과 무려 68분간 통화를 했다. 1시간이 넘어가는 통화는 사람의 마음을 발가벗기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보다. 주말에 각자 뭐하고 놀았는지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하소연으로 이어지는 통화는 조금 낯설지만 새롭고, 이내 마음에 스며드는 따뜻함으로 노곤 노곤해진다. 내 마음을 터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막상 이야기하다 보니 술술 풀어졌다. 마음의 주머니가 너무 버거워 조금은 풀어지길 바랬나 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나왔나 보다.
이번 주 주말에 독서모임 멤버 4명과 함께 서울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이라는 책을 읽은 김에 궁투어를 가는 문학기행이었다. 서울의 지리를 모르는 나는 잠자코 멤버들을 따라다녔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다 익숙한 것이 아닌가? 서울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전 직장의 건물이 시작이었다. 이어 시청광장과 덕수궁, 윤동주문학관과 청운문학도서관, 창덕궁,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길은 늘상 다녔던 출장길이었다. 서울시청으로 수십 번 회의를 하러 갔으면서도 시청 바로 옆이 덕수궁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몰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 번 들렀어도, 전시를 둘러볼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목표한 장소에 가기 급급해 주변을 둘러보고 여유를 가지는 것마저도 하지 못했다. 지난날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거지? 무엇이 그리 바쁘고, 무슨 일이 그리 막중했기에 여유가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난날과 달리 지금의 나는 다를까? 내게 주어진 순간을 분명 즐기면서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후회되는 직장인의 삶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점에서의 지난 4년의 시간이 눈앞에 스치운다. 독서모임을 3년간 무료로 운영하다가 이제야 유료로 전환했는데 손님들이 대거 이탈한 '탈퇴 행진의 날'도 기록되어있다.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고는 내게 돈 아꼈다고 자랑하는 손님도 있었지. 월세를 못 내서 은행을 전전하며 사업자 자금 대출받은 날은 코끝이 시렸다. "이제 서점 장사 잘되는 것 같은데, 독서모임 무료로 하고 자선도 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난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현실이 기막혔다. "서점도 사업인데 너무 바보같이 운영하는 거 아입니꺼"라는 구수한 사투리가 휴대폰 건너에서 들려온다. 그네의 목소리에는 염려와 애정이 묻어있다. 나를 대신한 그녀의 분노와 한숨이, 나를 되레 웃게 만든다.
가을은 소리 내어 울어보라는 기회를 주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 굴을 저만치 파고 내려 가도 괜찮다. 암울하고 힘든 순간을 계속 꺼내고 곱씹어도 괜찮다. 한없이 가라앉아 이내 침전하여도 괜찮다. 무너져 내려도 괜찮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더 처절히 자신의 마음을 내부셔라! 그러다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어라. 그렇게 탈력감을 느끼고 나면, 우리는 이상하게도 다음날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68분의 통화로 4년의 시간을 오간다. 사람은 어째서 좋았던 순간보다 힘들었던 시간을 더 짙게 기억하는 걸까. 매 순간 성실히 삶을 직면해왔기에 힘든 순간이 선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 출장길에서 외로움이라고는 느끼지 못했던 그 순간이 사실은 '외로움'이라고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지난날의 미련을 단 1박 2일의 여행으로 모두 보상받는다. 슬프고 외롭고 분노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사람들로 인해 함께 웃고 떠들었던 찰나도 있다. 그런 찰나들이 모여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은 마음의 힘이 된다. 아아,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게 소중한 인연을 몰아주는 이 서점을 포기할래야 할 수가 없다.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알아가고,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있으랴.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 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자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경애의 마음, 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