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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Feb 24. 2019

22. 내가 쪼잔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을 때

<내가 쪼잔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을 때>


나는 쿨한 사람이었다. 친구들이랑 밥을 먹을 때도 1/n 하는 게 못마땅해서 내가 먼저 계산하곤 했다. 회사에서 후배들과 커피를 마시러 갈 때도, '내가 선배로서 한 번 사주지'라고 생각하곤 여러 번이고 샀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베푼 만큼 돌려받을 때도 있었고, 베푼 만큼 못 돌려받을 때도 많았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내가 쓰고 있는 볼펜이 과장님 손에 가 있는 걸 보았을 때도 '새로 사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사무용품이 떨어지면 캐비닛을 열어 풍족하게 쌓여있는 포스트잇, 볼펜, 지우개, 연필을 가져오곤 했다. 다달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이 있으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살았다. 월급이 작은 건 항상 불만이었지만 혼자 살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참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도 소비습관은 바로 고쳐지지 않았다. 어김없이 12시 30분쯤 되면 커피가 땡겼고, 오후 6시쯤 되면 자극적인 MSG가 가미된 음식을 찾아 먹었다. 어느 날 회사동기들이랑 치맥을 할 때 묘한 기류가 있었다. 이제 나는 퇴직자라 돈이 부족할 텐데 회식값을 나눠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게 더 싫어서 먼저 계산하곤 했다. 첫 한 달은 그랬다. 그 달의 마지막 주가 되자 카드값이 한 번에 인출되었고 그때서야 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어느새 나는 누군가 먼저 사주길 기다리게 되었다.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바쁘다고 피하게 되었다. 커피숍의 커피보다 맥심 커피를 찾게 되었다. '배달의 민족' 어플을 지우고 집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집에서 폐인처럼 지내며 뭐할지를 고민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난 카페 사장이 되어있었다. 카페를 오픈하자 하나하나가 다 돈으로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손님이 뜨거운 물이 담긴 종이컵을 요구하신다. 그러면 나는 '잠시만요'라고 말씀드리고 냉큼 뜨거운 물이 담긴 종이컵을 드린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한다. '종이컵 31원. 컵홀더 64원. 냅킨 10장에 40원.'  물론 표정에는 절대 아깝지 않음을 꼭 드러내야 하고, 필요하면 더 드리겠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손님이 가고 테이블에 남겨진 64원짜리 컵홀더를 보면 아깝다. 재사용하고 싶어서 손을 들었나 놨다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흥청망청 써지는 냅킨도 10장 정도가 남을 때가 돼서야 채워 넣는다.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냉난방기를 일분이라도 더 빨리 끄고 싶어서 리모컨을 만지작 거린다. 


직장인으로서 얼마나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사무실, 미니 문방구라고 불렸던 캐비닛, 하루 동안 채워놓으면 다음날 비워지는 쓰레기통, 화장실 가면 항상 채워져 있던 휴지, 정수기와 종이컵, 갑티슈와 물티슈. 모든 게 있던 그 쾌적한 환경. 하지만 그만큼 낭비도 많을 수밖에 없었던 그 풍족했던 환경. 자영업자가 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껴 쓰자. 다시 쓰자. 그리고 안 쓸 수 있으면 쓰지 말자.  


(feat. 위의 단가는 1,000개 이상 구매했을 때 기준 단가입니다. 그런데 1,000개 언제 다 팔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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