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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짓기 Oct 15. 2024

할머니의 책가방

예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골풍경이 등장했다. 뉴스나 텔레비전 다큐에서 심심찮게 보여주는 시골 할머니들의 초등학교 입학 소식이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없는 시골 학교의 변화되는 모습 같아 기분 좋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학교가 아이들뿐 아니라 제때 배우지 못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배움의 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성경을 줄줄 읽어주고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던 1892년생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나는 엄마가 불러주는 편지를 받아써서 언니들에게 부치는 일이 내 학교생활 중 일부였다.

엄마는 토란대 껍질을 벗기거나 고구마 줄기 껍질을 까면서 내가 써야 할 문장을 불러주었다. 치직거리는 형광등불 아래 엎드린 나는 엄마가 불러주는 꽃피는 시골의 봄 풍경이라든지 가을걷이 때 보았던 들녘의 모습을 그림처럼 받아쓰곤 했다.

가끔씩 한숨을 섞어 불러준 문장에는 항상 ‘미안하다’라는 삐뚤빼뚤한 낱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오빠의 공납금이 없으니 염치 없지만 부쳐주면 안 되겠느냐, 어린 너희들한테 부모 노릇 못 해서 미안하다는 등. 엄마가 편지 내용을 불러주면서 해야 할 소일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편지지에 언니들 이름과 아프지 않고 잘 지내느냐는 머리글을 써 놓고 기다리면서 마지막 부분에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숙제가 많았는지 시험 기간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음에 써 주겠노라고 생색을 내고 편지쓰기를 미루었던 어느 날로 기억된다. 맞춤법도 맞지 않고 글자 크기가 칸을 넘어버린, 페이지를 채우지 못한 편지 한 통이 보였다. 받침이 거의 없는 내용을 꿰맞춰 읽어보니 엄마가 언니들한테 보내는 편지 내용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내가 자꾸 미루다 보니 더럽고 치사해서 엄마가 직접 쓴 편지인 듯했다. 얼마나 진땀을 뺐을까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글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엄마의 자식이라는 게 창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엄마보다 훨씬 나이 많았던 할머니도 그 길고 어려운 성경을 줄줄 글을 읽었기 때문에 엄마는 단지 농사일 때문에 편지 쓸 시간이 없어서 나한테 불러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당시 외갓집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글을 모르는 엄마가 얼마나 어둡고 안타까웠는지를 깨닫지 못해서라는 변명을 해본다.


텔레비전으로 초등학교 입학한 할머니들의 생활을 보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살아계셨더라면 지금쯤 엄마도 막내딸한테 받은 설움을 씻으려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면 나는 예전에 못했던 효도를 실컷 해드릴 수 있을 텐데. 책가방이며 필기구며 최고 좋은 상품으로 사서 엄마 가방에 볼록하게 넣어드릴 텐데. 왜 한 번도 엄마의 가슴에 묻힌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무심한 딸이 돼버렸을까.

언젠가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가 여든의 나이에 한글을 익혀 쓴 일기를 보고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시려 왔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명시였다.  101살 나이로 작고하신 일본의 시인 할머니도 98살에 시집을 내셨는데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150만 부 이상 팔리기도 했다.

고등학교도 의무교육이 된 요즘은 분명 고학력 시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움을 멀리하는 걸 보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집안의 살림밑천이어서, 또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라는 이유로 글자를 익힐 기회를 놓친 할머니들이 아직은 많이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또한 대한민국이다.


아침마다 할머니들은 책가방에 교과서와 공책을 챙겨 넣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여생의 희망도 같이 챙겨 넣는다. 글자를 익히고 배우는 내내 행복해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이 할머니들의 작은 소망은 가슴에 묻어두었던 편지 한 통 쓰는 것. 가슴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발굴되어 편지라는 이름의 보물로서 전시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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