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책이 있는 그곳으로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다.”
덴마크 왕립도서관을 보고 나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선을 사로잡는 웅장한 디자인에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외관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고 해서 블랙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도서관이었다. 유럽 여행을 앞두고 딱히 도서관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다. 다만 여행 책자에서 소개하는 랜드마크 도서관들은 잊지 않으려고 빨간 동그라미를 쳐두었을 뿐이다.
처음엔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물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다 점점 도서관 안에서 풍기는 그 무언가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그것은 세상 모든 지식이 축적된 인류의 위대한 자산, 책이 내뿜는 엄숙함이었고, 이 지역에 뿌리내려 살아온 그들이 자연스레 피어 올리고 향유하는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이었다.
‘다시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8여 년간의 편집자 생활을 끝으로 주부로만 살아가던 나에게 새로운 욕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저렇게 근사한 곳에서 책으로 둘러싸여 하루종일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진심으로 사서가 부러웠다. 안경을 추켜올리는 손짓 하나에도. 서가 사이를 다니며 뭔가를 부지런히 하는 몸짓 하나에도 그들에게선 뭔지 모를 전문가 포스가 풀풀 풍겼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 없었다.
블랙다이아몬드를 다시금 올려다보며 난 결심했다.
‘책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5개월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사서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알아보니 사서교육원이란 곳에서 전공과 상관없이 석사 학위만 있으면 1년 만에 2급 정사서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아니, 대학의 문헌정보학과에서 4년을 공부해 얻을 수 있는 전문 자격증을 1년 만에 딴다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서교육원의 문을 두드렸다. 사서교육원의 당락은 서류 심사 성적과 면접 성적을 합한 점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서류 심사 성적이란 최종학력의 학점이었다. 학점이야 지금 손 써볼 수 있는 게 아니니 면접만 준비하면 된다. 그런데 그 면접이 걱정이었다. 난 도서관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무했다.
공공도서관에 가 책을 빌려왔다. <문헌정보학 개론>이라는 두꺼운 책이었다. 문제는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도 문헌정보학에서 쓰는 단어라도 익숙해지자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면접이 있던 날은 1월의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한층 더 춥게 느껴졌다. 하지만 두툼한 패딩 점퍼 대신 예쁜 코트를 차려입고 평소 잘 안 신는 부츠까지 챙겨 신었다. 사서교육원으로 들어가는 대학의 교정에 하얗게 눈이 쌓여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과연 내가 이 교정을 다닐 수 있게 될까? 2017년은 사교육원으로 시작해 사서 자격증으로 끝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실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다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다행히 면접관들은 진땀 빼는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얼마 후, 합격자 명단에서 내 번호를 확인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내가 사서가 될 상인가?’
아마 면접관들은 내게서 간절함의 눈빛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개강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패딩 점퍼를 벗어 두기엔 싸늘한 3월 초 어스름한 오후 6시 30분, 사서교육원 수업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사서교육원엔 나와 같이 사서에 대한 충만한 마음을 가진 40명의 새내기 학우가 모였다. 나이도 전공도 다양했다. 대학교 직원이라는 내 또래 학우는 사서 자격증을 취득해 도서관으로 보직을 옮기고 싶다고 했고, 영어 도서관 관장으로 있다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학우는 좀 더 전문적으로 도서관을 운영해 보고 싶다고 했다. 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했다는 젊은 학우는 고문헌도서관에 일하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모두 사서 자격증을 취득해 또 다른 커리어를 쌓길 원했다.
1년간의 수업 커리큘럼이 나왔다. 무얼 배울 것인지 예측 불가능한 제목의 강의가 수두룩했다.
“아니, 문헌정보학 공부가 이런 거였어?”
<데이터베이스 연구>, <데이터큐레이션>, <메타데이터론> 등…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에게 퍽이나 낯선 영역이었다. 특히나 <데이터베이스 연구>는 2학기 성적우수 장학금을 노리는 나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다분히 이과생스러운? 과목이라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 예상과 달리 책과 독서에 대한 수업이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배워야 할 건 어떻게 정보를 분류하고, 서지 목록을 작성하고, 적절한 정보를 서비스하고, 장서를 관리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책이 좋아 선택할 직업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난 사서란 직업을 퍽 오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로운 학문을 배운다는 설렘보다 잘해 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수업을 듣다 종종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도서관학이라는 바다에 풍덩 다이빙했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어푸어푸 허우적대는 저 얼떨떨한 얼굴.
‘1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수업을 마칠 때쯤엔 밖은 이미 깜깜한 어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