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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Jul 15. 2016

인생의 세시기

철수의 그림이야기 8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인생의 세시기>,  1905년,로마,국립근대미술관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아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인



죽음을 앞두고 늙어가는 노인




이 그림의  인물들은

'인생'

세 막을 담당합니다.




'여인의 세시기'  혹은 '인생의 세시기'라고

알려진  이 그림은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성을 그린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오늘은  '인생의 세시기'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클림트에게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다준 '세 가지 결정적인 시기'를

 설정해서 포스팅을 진행해보려 합니다.









1862년 7월 14일 빈 외곽의 한마을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클림트는  어릴 적부터 예술적 재능 이타 고나 이후 미술공예학교에 장학금을 받으면서 미술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동생 에른스트 역시 미술교육을 받아, 프란츠 마츠와 함께 세 명이서 '예술가 컴퍼니'라는

아티스트 그룹을 결성합니다.




'예술가 컴퍼니'는

특유의 젊은 감각과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고객들로부터 박물관 내부장식 등의

작품 주문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  

1892년 클림트는 인생의

깊은 첫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생 에른스트와 아버지의 죽음.

멤버였던 에른스트가 세상을 떠나니 예술가 컴퍼니도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깊은 상실감을 느낀

클림트.




<1> 시련의 극복




하지만 클림트는

오히려  이 시련을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아

객관적으로 자신의 예술을

살피고 반성하며 예술가로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진면모를 보입니다.




클림트,<사랑>,1895년, 빈,역사박물관



1895년부터 클림트는 편집자 게를라흐가  

제안한 <우의와 상징>이라는

시리즈 작업에 착수합니다.




클림트,<우의화 <비극>의 최종습작>,1897년,빈,역사박물관


이 당시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앞으로 클림트 그림의  상징이 될

 '여인'과 '신비스러운 장식'의

 묘한 조합의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오묘하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화풍은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도 있을 수 있겠지만

19세기 말인  당시 유럽의 지배적인 실증주의에 질린 예술가들의 하나의 저항적인 표현의 집단적 반영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상징주의'인데요.  각국으로 확산된  '상징주의'는 다양한 예술 양식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주의의 파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 뜻을 같이했습니다.






 작가는 예술가로서 개인적 진보를 거듭해나갔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오스트리아 예술전체의 발전을 바랐던  클림트는 1897년 4월 3일 오스트리아 조형예술가 연맹 회합을 통해  

그해 5월  예술가 조합과의 '분리' 선언에 앞장서게 됩니다.





'분리주의'는 클림트를 수장으로 하는

혁신적인 오스트리아 젊은 예술가들의 연맹으로서

'예술'이 고립되지 않고 국제적인 흐름을 받아들여  대중들과 사회 전체의 미학적 취향과 이해도를 한 차원 고양시키려 한데 목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1902년 분리주의 예술가들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동상을 기리기 위해

'베토벤 전시회'를 개최하고

클림트 역시  작품을 제작합니다.



클림트,<베토벤프리즈>두번째벽면, 1902
클림트,<베토벤프리즈>,1902



<2> 황금과의 만남.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빛 장식과 농염한 자태의 여인들이 등장을 하는데요.  클림트의 화풍이 완전한 양식적 변환을 이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금'은 클림트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요.



1903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클림트.

베네치아의 라벤나를 방문했을 때 본

모자이크 작품들로부터 큰 영감과 자극을 받습니다.




클림트의 한 친구는

 클림트가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클림트는 황금빛이 갖는

눈부신 화려함과 추상적인 속성에 매료되어,

작품에서 시간을 초월한 신비스러움을 표현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의 인물을 구상하는 도구로 황금빛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클림트,<희망2>,1907-1908,뉴욕,근대미술관


클림트,<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 1903,빈,알베르티나미술관
클림트,<다나에>,1907-1908


사실 이 시기는 

클림트 예술작품들의

 '황금기'였지만


작가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이도 했습니다.



분리주의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실패를 선언하고 18명의 동료들과 함께 분리주의를

빠져나와  새롭게 '클림트 그룹'을 만들기까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오히려 클림트는

자신의 예술작업에 더 집중하는 프로의 자세를 보입니다.




클림트 ,<키스>, 1907-1908, 빈,오스트리아미술관




1911년

 클림트는

 국제적인 명화가 반열에

합류함으로써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나, 스스로 더 이상  자신의 작품에

새로움이 없다는 예술가로서의 슬럼프에 빠져듭니다.




<3> 색채를 더하다.




 해결책은 다름 아닌

기존의 황금빛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를 가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비스러웠던

그의 그림에

자연스러움과  생명력이

 더해지기 시작합니다.


클림트,<닭이 있는 채소밭>,1916년
클림트,<부채를 든 여인>,1917-1918,개인소장
클림트,<여자친구들>,부분,1916-1917
클림트,<죽음과삶>, 1911-1916.







클림트가 활동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나 너무나 국직 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다양한 예술적 사조들이

쏟아져 나오던  혼란과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상징주의, 아르누보,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파


물론  클림트도

'분리주의'라는 그룹 속에

소속되어있었지만 사실

분리주의는 어떠한 특정한

공통적 예술적 양식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닌

기존의 고리타분한 예술에 저항하는 하나의

의지를 닮고 있는 개개인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했습니다.



더불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를 남길 만큼

많은 여인과 사랑했던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던

평생 자유로운 연애를 한 클림트.


1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클림트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작업에 열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나갔습니다.



끔찍한 전쟁도  

사랑하는 애인도

특수한 예술적 이데올로기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관능적인 미와 장식의 세계를 탐닉했던  그에게는 오직 예술 그 자체만이 유일한 현실이었습니다.




클림트, <처녀>,1913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효과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시기를 설정해보았습니다.  클림트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지만 특히 한국에서 전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작가 중에 한 분이죠.  다음에 전시회 가실 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  오늘 포스팅을 마치려 합니다.





출처


*타탸냐 파울리, 클림트 -분리주의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금빛 황혼, 마로니에북스, 2009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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