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17<소년파르티잔>
세상의 풍파에 지친이들, 절대적 고독과 허무함에 삶이 무력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는 무엇일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떠나야만 하는 그들에게 이상적인 쉼터가 있다. 그레고리가 운영하는 이 공동체는 힐링캠프다. 자급자족으로 생활하며 버려진 미혼모들이 편히 쉬며 그들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생활하는 이 소규모의 유토피아에는 걱정따위는 없다. 엄마들은 무료하면 햇빛에 선탠을 하며 낮잠을 즐기고 아이들은 실컷 뛰어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예쁘고 안락하게 꾸며진 정원이며 삶의 기쁨이 넘치는 이곳에 특별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한 아이가 있다. 알렉산더, 아이들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많고 눈에 띄게 영민한 이 아이는 그레고리(뱅상카셀)가 제일 아끼는 공동체의 에이스이기도 하다. 푸른눈에 무언가를 깊이 직시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진실을 말해야만 할것같은 최면에 걸릴 듯 하다.
공동체의 온전하고 흔들림 없는 행복의 근간에는 짙은 폭력성이 숨어있었다. 그레고리는 아이들에게 살인 청부와 관련된 지식과 총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의뢰가 들어오면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씩 파견해서 일을 처리하게끔 하는 식으로 돈을 벌어오고있던것이었다. 철저히 교육된 폭력에는 윤리의식이 자리잡을 틈이 없었다.
FPS 게임 미션처럼 진행되는 모의전투에 아이들은 신이나 있었고,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폭력에 노출되어가고있었다. 살인을 게임처럼 가볍게 여기는 비극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 장난처럼 이상적이고도 잔인한 커뮤니티는 어디서 탄생했으며, 어떻게 운영이 되어가는 걸까? 이 모든 시작엔 어른들의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었다.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은 몸을 움츠리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단절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갈수록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상처를 붙잡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그들의 아이들과 말이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엄마와 외딴 곳에 와서 마주한 실상은 어떠한가?
살인을 게임처럼 즐기고, 행복을 지키기위한 명분으로 세상과 단절된채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한지가 궁금했다. 세상을 올바르게 마주할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기위해 세운 그들만의 세상, 과연 안전할까 큰 의문이다.
완전한 이상이란 것은 없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절대적'일수 없다. 그저 개념적인 말일뿐, 상대적이라는 말의 반의어 일뿐이다. 그런 뜬 구름같은 이상을 따라 만들어진 세상이 절대적일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새어나가는 물줄기를 막으려면 무너지지 않을 크고 강력한 돌이 필요했고, 그레고리는 나름대로의 독재적인 룰을 만들어 나갔다. 룰은 간단하다. 그의 말이 곧 법. 의견교환은 없다. 그저 말을 잘 들으면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영민하고 예민한 관찰력으로 그 새어가는 거짓의 혹은 진실의 물줄기를 포착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것을 따라갔다. 결국 마주하게된 실상, "진실을 때론 말하기 정말 힘들지."라는 팝송의 가사 처럼 힘겹게 알아낸 사실에 머리가 아팠다. 참고 참아왔던 그는 결국 이 거짓말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극단적인 것은 늘 무언가가 결여되기 마련이다. 그 틈을 메우려 집어넣은 억지스러운것들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지 못한것이다. 그래서 오래가지못하고 곧 그 힘을 잃게 된다. 애초부터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없었다. 슬픔에 아파,어쩌면 희망에 기대해 진실을 외면하느라 그들이 세운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잘못불러왔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