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의 그림이야기
- 장 레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샤갈에게 바치는 찬사>, 파리, 1969년.
모이슈 샤갈은 1887년 7월7일 리투아니아와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벨라루스 비테브스크에 있는 전통적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 샤갈은 특유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단순하게 동화라는 단어로 함축하기엔 더 많은 은유와 상징적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그가 사랑하고 시도하고 꿈꿔왔던 것들을 5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고향에서 기초적인 그림교육을 받은 샤갈은 계속해서 스스로 그림 작업에 매진한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좋은 기회로 후원자의 금전적 지원아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파리는 러시아 청년의 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자유, 사랑의 빛깔’을 구현해 놓은 것으로 비쳤다. “파리에서 나는 모든 걸 발견한 것 같다.” “나는 러시아에서 나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 빛을 비춰주었다.” 라는 그의 말처럼, 파리에서 그는 많은 예술과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오롯이 자신의 예술세계에 천착할수 있게되었다. 특히 그는 러시아에서는 모처럼 접하지 못한 대가들의 그림을 루브르에서 마음껏 감상하고 연구할수 있음에 만족했다. 파리는 그가 직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신념과 확신을 갖게 끔 충분한 문화적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당시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이자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사조가 탄생하는 산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샤갈은 참신하고도 혁명적인 아이디어들에 감탄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고유의 화풍을 정립하게 되었다. 청년 시절의 파리생활은 그가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찾고 화풍을 정립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1914년 4년째 자신을 기다리는 약혼녀 벨라를 보러가기 위해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비트베스크로 돌아간다. 그 사이 제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거대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샤갈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정치적인 암투와 서로에대한 경계속에 지친 그는 자유롭고 평화로웠던 파리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1922년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우선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후 7년간 소식이 끊겼던 오랜친구 블레즈 상드라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돌아오게. 자네는 유명해졌어. 볼라르가 자네를 기다리네.” 1923년 9월 1일 샤갈가족은 파리를 향해 출발한다.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듯이 내 예술은 파리를 필요로 한다.” 샤갈은 두번째 파리생활기간 동안 볼라르를 만나 판화가로써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한층 더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1925년 이후 그의 그림은 사랑의 교감으로 행복의 빛을 발한다. 그의 색조는 원색으로 반짝인다. 군청색과 황금색, 코발트색과 주홍색이 한데 어울려 정교한 색채의 교향곡을 이룬다.” ”<농부의 삶>은 <나와 마을>의 ‘프랑스판’이다. 이렇게 밝아진 분위기는 알록달록한 배경 처리에서 잘 나타나는 매력적인 색채감각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가족들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예술가로서의 성공까지 모두 이루어낸 이 시기는 그에게 더 없을 행복한 시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이후 또다시 전쟁의 기운이 살아나면서, 유대인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샤갈일가는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파리에서 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화가 스스로 영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이디시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며 유대인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이전과 다르게 소극적인 인관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 벨라가 떠난 이후로 샤갈은 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딸 이다의 소개로 만난 두번째 부인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간다. “파리는 내 마음이 반사된 모습이다. 나는 나만의 독자적인 존재이기보다는 파리와 하나가 되고 싶다.” 이 후 샤갈은 죽을때까지 프랑스에 머무르며 예술활동에 전념한다. 파리는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장소였다. 젊은날의 청춘이자, 가족들과의 행복한 추억이고, 끊임없는 예술적영감을 주는 곳이었다.
샤갈은 35살의 나이에 판화라는 새로운 표현수단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판화에 의해 성숙해졌다.” 샤갈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최초로 동판화의 기법을 접할 수 있었고, 몇년 후에는 동판화의 대가로 꼽히게 된다. 피카소를 발굴한 최초의 화상이자 재능 있는 편집자인 앙브루아즈 볼라르와는 샤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에게 삽화작업을 맡긴다. <죽은 영혼> 과 <성서>의 삽화, <볼라르의 서커스>연작은 오늘날에도 화가와 화상의 가장 성공적인 공동작업으로 손꼽힌다. 샤갈의 판화작업은 단순한 선의 사용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작업할 때에도 조각칼, 뾰족한 칼, 붓, 와니스 등의 다양한 도구를 사용했고, 인쇄를 마친 종이에 직접 색채를 입힘으로써 기존 무색채의 판화의 개념을 뒤엎어버렸다. 볼라르가 부탁한 라퐁텐의 <우화> 삽화 작업을 마친 샤갈은 견본으로 찍은 8500장 하나하나에 일일이 붓으로 터치를 하거나 구아슈, 수채화 등을 덧붙였다. 샤갈의 열정과 섬세함에 반한 볼라르는 이후 샤갈에게 더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들을 부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그(샤갈)의 미학은 라 퐁텐의 미학과 비슷한 것이어서 아주 친근하고 순박하면서도 섬세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오.” 이후 그둘은 환상의 파트너가 되어 많은 삽화작품들을 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6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샤갈은 판화 부분 대상을 수상한다. 판화가로써의 성공은 두가지 면에서 샤갈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첫 째는 그의 작품을 대량으로 보급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수있는 홍보성에 있었고, 두 번째는 유화작업에만 머물렀던 그의 화풍이 판화에서도 효과를 발휘하고 더 성숙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술가로서의 입지와 작품의 발전을 가져다준 판화작업은 샤갈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키워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나의 마음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 투명한 막을 상징한다.”
샤갈은 70세라는 나이에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이 가져다주는 반투명한 효과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샤갈의 첫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1957년 아시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세례당에 설치된다. 메츠의 생테티엔 대성당(1958)과 그 뒤를 이은 예루살렘의 하다사 메디컬 센터(1960)에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한다. 사르부르의 코르들리에르 소성당(1975), 마인츠의 성 스테파누스 교회(1978) 그리고 수수한 마지막 작품인 코레즈의 사양 소성당에 이르기까지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공적인 빛의 봉헌으로 인정받는다. 30여 년간 샤갈은 프랑스와 미국, 이스라엘, 영국, 스위스, 독일의 15군데의 건물에 그의 특출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 빛이 들어오게 한다. 샤갈은 뒤늦은 나이에 열정적으로 새로운 예술작업에 매진한다.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비교적 생소하고 다루기 어려운 매체에 샤갈이 매료된 이유는 크게 두가지라고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유대교 신자로써 신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종교적 표현수단인 스테인드글라스는 필연적인 예술적 귀결이었지 아닐까 한다. 종교의 엄숙함과 신비함이 극도에 달한 중세시기, 그중에서도 특히 고딕양식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전성기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함께한다. 교차궁륭과 아치의 사용 및 기존의 두꺼웠던 내부 기둥을 얇게 줄이고 바깥에 부벽을 설치함으로써, 교회 내부공간은 넓어지고 높아졌다. 하중에 대한 건축적 한계로 부터 자유로워진 교회의 건축물은 자연스럽게 넓은 창을 쓸수 있게 되었고, 그 창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다채롭고 신비한 색채의장으로 대체된것이다. 그러므로 스테인드글라스는 샤갈의 신도로써의 신에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소재였다. 두번째는 그의 풍부한 색감과 다양한 색조변주를 드러내기에 스테인드글라스는 더없이 알맞았다. 그의 유화작품을 살펴보면, 많은 작품들이 여러 색면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같은 색면들안에서도 서로다른 색조들이 차이를 내며 어울려 생동감을 자아낸다.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여러 색유리들을 접합하여 종합하는 작업방식으로 제작된다. 유리조각들안에서도 색조 조절이 가능했고, 이는 샤갈이 평소에 추구하는 작업방식과 상당히 일치했다. 회화적요소가 짙은 스테인드글라스는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샤갈은 뒤늦은 나이에 새로운 분야의 작업일지라도 큰 괴리감없이 쉽게 작업에 임할수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벨라샤갈, <불을 밝히며> 갈리마르 1973년
샤갈에게 있어서 사랑은 크게 연인에 대한 사랑과 신에대한 사랑으로 나뉜다.
그의 첫번째 아내 벨라는 예술에 있어서 뮤즈이자 삶에 있어서 영혼의 파트너였다.
“오랜 동안 그녀의 사랑은 나의 예술을 채워왔다”. 라는 그의 말처럼 많은 그의 작품속에 벨라가 등장한다. 샘솟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과 편히 쉴수있는 영혼의 안식처였던 벨라는 1944년 9월 2일 미국에서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샤갈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그림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갑자기 잃는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절망에 빠진 샤갈은 이후 9개월 동안 붓을 들지 못한다.
“내가 만물에 느끼는 이 사랑”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적인 깨달음과 종교적인 감정,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이 그림들을 이 미술관에 걸어두고 싶어했다. “
샤갈은 평생을 독실한 유대인으로 살았다. 자유로운 예술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견실하게 종교적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를 전쟁의 고통과 정치적 음모 속에서 구원해준건 신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나는 내 삶과 예술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성서에서 말하는 신의 말을 따라 삶을 살아내고, 고통을 이겨냈다. 그리고 그의 그림속에 그 이야기를,경험을 녹여냈다. 샤갈의 그림은 영성이 가득하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나에게 예술과 인생의 완벽함은 성서에서 유래한다. 성서를 근원으로 한 이런 정신적인 부분이 없다면 인생에서나 예술에서 논리적인 구조나 형태의 구성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샤갈 <마르크와 벨라의 기증증서>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 메시지 미술관, 니스 ,1973년). 샤갈에게 있어서 신에대한 사랑과 믿음은 연인을 향한것 만큼이나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것이었다. 그리고 샤갈은 유대인들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여기는 자만심과 타종교를 배척하는 배타성을 초월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이 말하고자하는 것 ‘사랑’을 실천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종교적인 도상들이 등장하지만, 어떠한 강력한 전도적 목적을 찾아 보긴 힘들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종교화 혹은 성화라 이름 지어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신의 사랑이 넘치는 동화에 가깝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 공존하는 환상적인 동화말이다. 1958년 2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강연 중 질의 문답 인용을 끝으로 이 장을 마치고자한다.
Q: 한가지 더 묻겠다. 예술가에게 종교적인 신념은 필수적인 것인가?
A: (샤갈)"예술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명예나 물질적인 보상 같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창조된 예술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
나는 그림을 선택했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안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기교이고 나의 종교이다. 수세기 전의 오랜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새롭고도 오래된 종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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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마르슈소,『샤갈』,(주)시공사,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