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조력자

시뮬라시옹

by 영영

요즘은 친구끼리 만나 식사를 할 때도 카메라 어플을 실행하기 전에 음식에 손대면 실례다. 눈치 없이 음식부터 입으로 가져가다가는 아줌마 소리를 듣는다. 나도 SNS 매체를 이용해 일상 사진을 공유하게 되면서 사진부터 찍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게 음식 앞에 두고 뭣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인스타 감성에 부응하자면 식욕은 보류하고 참을성을 발휘해야 한다.

음식 사진도 연출이 필수인지라 티 안 낸 사뭇 고급진 음식 사진을 위해서는 표지가 아름다운 책 서너 권 정도는 탁자 위에 등장시켜야 한다. 그것도 매번 다른 책이 좋을 것이다. 책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찍히기 위해서 필요하다. 패션몰 상품 사진 잘 찍는 방법의 하나로 《KINFOLK》 잡지를 추천하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모델의 손에 책을 들리거나 착용한 백에 책 귀퉁이가 드러나게 넣어두면 세련된 이미지가 나온다는 팁이었다. 차분한 배색과 정갈한 《KINFOLK》의 표지는 훌륭한 조연의 역할을 거뜬히 해낸다. 이렇다 보니 《KINFOLK》에 모델료를 쥐어줘야 할 판이다.



에어비앤비 숙박업체에도 책은 훌륭한 조력자다. 근래 제주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예약을 위해 둘러본 숙소 중에 책의 효과를 톡톡히 살린 집이 있었다. 식탁을 마주한 싱크 면에 색상이 조화롭고 서체가 아름다운 책 여러 권을 전면이 보이도록 배치해 둔 것이 아닌가! ‘숙소 보기'에 소개된 사진은 예약을 쾌속으로 진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대의 사진은 시뮬라시옹이다. 표상이 실체를 대신하는 것으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사용한 개념이다. 가상의 이미지가 실체 자체를 대체하는 사태로 전개되는데, 예를 들면 카메라 어플로 찍은 사진이 자신의 실체를 대신하다 못해 하나의 독립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실제 인물을 다소 멋져보이게 하는 것에서 더 확대되어 나라는 인물과 별개의 독자성을 가지고 오히려 그것이 진짜가 되는 사태다. 세상에 넘쳐나는 사진은 실물과 다른 하나의 이미지로 행세한다. 하기야, 요즘의 여행이라는 것도, 사진에서 본 장소를 다만 확인하고 다시 사진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발견의 행위가 아니고, 이미지로 각인된 곳으로 가서 확인하고 인증하는 행위가 여행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진은 이제 실체를 넘어선 리얼리티의 세계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책은 독서와 지성의 메타포로서 다른 사물과는 다른 기호작용을 한다.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기호를 넘어서 있다. 책이 있는 숙박업체의 사진은 내게 여행에서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제주여행 중에 나도 모르게 숙소의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이미지로 각인된 책의 기호가 내게 행동을 지시했던 것이다. 책의 이미지에 따라 독서의 열정도 생겨날 수 있다. 아이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전면책장을 권유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독서교육은 책을 얼마나 아름답게 노출시키느냐의 문제로 시작된다.


김영하 작가의 강연에서 들은 바로는,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부모의 체계적인 독서교육이나 열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집에 책이 많은 아이라는군요. 우리 집 아이들은 언제나 되어야 책을 많이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독서는 책의 양에 비례한다니 위로는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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