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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un 28. 2021

귀한 몸이지만

책의 변형과 책의 기호

어릴 적에 부친께서는 책을 거꾸로 꽂아두거나 바닥에 방치해 두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밟기라도 하는 날에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정서가 습득된 것인지, 나 또한 책을 다른 물건들처럼 취급하고 훼손하거나 다른 쓰임으로 쓰는 일에는 왠지 모를 꺼림직함을 갖고 있다. 모기가 윙윙 날아다닐 때 마땅히 내려칠 것이 없어 급하게 두리번 하면서도 지천에 널린 책으로는 때려잡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문화적 풍토일까? 그러고 보니 예전엔 교과서를 받으면 책의 표지를 전용 비닐로 포장부터 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아직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책 표지를 따로 싸서 보관한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색을 칠하고 귀퉁이를 접어놓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함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에 외국의 아티스트북 사례를 보면 오래된 책을 자르고 덧칠하고 떼어 붙인 것들이 많다. 책을 단지 사물로 생각한다면 별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창의적 업사이클링에 가깝다. 검색을 해보면 책을 재료로 삼은 예술적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책이 가진 정체성과 확장성에 대해 놀라게 된다. 

그런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책은 사물을 넘어서 있다. 확장된 또 다른 신체로서, 훌륭한 선인의 지식이 담긴 책들은 저자와 동일시될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고 소중히 다뤄져왔다. 하지만 요즘처럼 책이 흔한 시절이 있었던가. 어디에라도 책이 있고, 단체에서 발행한 무료 배부 책도 많다. 생산량과 비례하여 버려지고 있다. 누구라도 책을 출판할 수 있고, 읽어보면 보잘것없는 책들도 부지기 수다. 책의 권위라는 것이 해체되고 있다. 명령만 있는 수직적 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수평적 관계로 변하고 있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죄책감을 내려놓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책의 몸을 활용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는 것도 책의 미래가 아닐까? 그림이 많은 책은 꼴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새로운 책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 책에서 잘라낸 문장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거나 해체 후 여러 책을 모아 다시 제본할 수도 있다. 책의 변형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창의적 발상이 필요한 때는 아닌지.


해체의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전 인류에게 굳건한 기호다. 독일 카셀에서는 세계 최고의 미술 축제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가 열린다. 여행 중에 일정이 맞아 운이 좋게 나도 관람을 한 적이 있다. 2018년엔가 마르타 미뉴인Marta Minujin작가의 ‘Parthenon of Books’라는 거대한 설치작품을 보았는데 금지 도서 10만 권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복제한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던 당시 검열을 통해 책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지어진 조형물이었다. 수많은 책으로 감싸인 거대한 건축물 기둥 사이를 걷자니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책이라는 오브제는 지혜의 기호다. 거대한 지혜의 신전이 나치의 만행이 저질러진 장소에 지어진 것이다. 그 책 어느 것 하나도 읽을 수 없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밀려왔다. 행사가 끝난 후 관람객에게 그 건물을 해체하여 책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나도 줄을 서서 오랜 기다림 끝에 신전의 일부였던 책 한 권을 받아왔다. 파르테논 신전의 유적인 책을 가져오니 마치 그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내가 참여한 것만 같았다. 아직도 소중히 그 책을 보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져온 책은 단 한 줄도 읽지 못했습니다. 영어가 아닌 것은 알겠는데 이게 어느나라 말인지, 아마 독일어가 아닐까 싶네요. 제목은 『Leo Tolstoi Volkserzãhlungen』랍니다. 이책에 대해 아시는 분은 저에게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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