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외투 벗기기
책도 외투를 입는다. 양장본은 대부분의 표지를 감싸주는 외투가 있다. 외투-덧싸개-를 입은 책은 결혼식 하객처럼 반듯한 인상이다. 덧싸개는 날개의 접힘을 제외하고는 책의 신체를 따라 부드럽게 연결된다. 주름 하나 없는 외투는 내용물의 가치를 높이기 마련이다. 귀한 손님을 대할 때처럼 책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책을 만지기 위해선 먼저 손을 청결히 하는 것이 좋다. 기왕이면 책상 위도 말끔히 치우고, 책상과 책의 수평을 가지런히 맞춘 후 찬찬히 책을 감상해야 예법에 맞다.
멋진 외투라면 책을 펼치기 전에 시간을 들여 감상한다. 그다음 검지 끝으로 살짝 표지를 넘기고 외투를 벗긴다. 손은 매우 조심스럽다. 손님의 외투 속을 슬쩍 들춰보는 주인장이다. 당사자라면 당황할 일이다. 하지만 들춰봐 주길 기다린 손님도 있다. ‘어멋! 왜 이러세요’ 하고서는 속으로는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외투의 수수함에 비해 꽤 대담한 색채를 숨기고 있는 손님도 있다. 외투의 겉보다 더 정성을 들인 안감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손님의 노고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외투 벗기는 내 취미는 꽤 진지한 행위다.
제일 시시한 경우는 외투와 양장 표지가 동일할 때다. 같은 옷을 두 번 입은 것처럼 어이가 없다. 마치 ‘더러워지면 벗으려고 여분의 외투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예 외투를 벗고 책장으로 들어갈 모양새다. 내 서가의 책들을 보이는 대로 벗겨봤다. 『인지심리학』, 『상품의 역사』, 『조선 전래동화집 연구』, 『한국신화의 연구』, 『뇌과학의 모든 것』 등은 안과 밖이 같다. 그렇다. 이건 이유가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진지한 부류다. 일명 도서관에서 환대받는 책이다. 그곳에 가면 다들 옷을 벗고 책장에 꽂힌다! 책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외투를 벗고 입장하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을. 이들에게 외투는 자신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난 도서관에서 양장본을 만나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모두 외투를 벗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외투의 반전을 숨기고 있던 책들이 당황스럽게 벗겨진 채 독자를 만나는 일이다. 특히 단색의 천으로 감싸인 몸을 가진 책들은 대개가 외투가 화려했던 책들이다. 안타깝다. 목적지가 목욕탕인 줄 모르고 한껏 차려입고 나선 꼴이 되어버렸다. 그 외투들은 다 어디에 보관 중일까. 버려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궁금하다. 외투 보관소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곳을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외투벗기기 취미꾼으로 꽤 보람을 느낀 책은 역시 소설이나 에세이집이다. 이론서나 두꺼운 양장본은 도서관에 어울리는 탓에 디자인에 힘을 주지 않지만, 개인들에게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장용 책들이나, 서점에서 독자와 1:1로 마주해야 하는 책들은 외모에 공을 많이 들인다. 『종이달』(가쿠다 미쓰요, 예담, 2012)의 외투 속에는 소녀 같은 연핑크 마감 천이 있다. 『무의미의 축제』(밀란 쿤데라, 민음사, 2014)는 하얀 외투를 입고 있는데, 그 안에는 보라색이 기다리고 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속에 칼을 숨기고 있으며 심지어 면지는 은색이다. 모두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테니 각자의 책장을 탐색해 보는 것이 좋겠다.
덧싸개 표지 외에 덧입는 것이 있다. 스카프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작은 패션 아이템으로 그날의 차림이 생기 있기도 하고 품위 있기도 하듯이 띠지도 그런 멋내기 아이템이다. 표지의 색상과 전체 분위기에 따라서 띠지는 달라진다. 명도가 낮은 표지엔 밝은색 띠지를 쓰고, 무채색이 주된 표지에는 컬러 띠지를 써서 주목도를 높인다. 표지가 책의 전체 분위기를 드러낸다면 띠지는 대비적 요소로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로써 첫 만남의 순간에 위력을 발휘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책을 사고 난 후에는 꽤 거추장스러운 것이 띠지다. 띠지는 책을 사고 나면 버리는 사람도 있고, 분실되지 않게 테이프로 고정시켜 두는 사람도 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잠시 벗겨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입혀서 꽂아두는 편이다. 그런데 독서가 끝나고 찾아보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띠지의 이런 점도 스카프와 비슷하다. 벗기는 쉬우나 챙기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