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몸에 집착하다_
2년전에 책방을 열었다. 아직도 묻는다. 돈은 버냐고,
그렇다. 이 개업은 사업이라기보다 나의 책에 대한 집착의 결과다. 집에도 책이 한가득이고, 연구실에도 책이 한가득이다 못해 아예 서점을 차려 책을 실컷 가져보고자 하는 욕망을 <서점개업>으로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책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명리학으로도 설명이 된다. 이년전 책방을 개업해도 되려나 하고 삼담하러 갔더니 사주가가 말했다.
"사주에 목(木)이 부족하시군요, 책은 나무로 만들어지니 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대운에 계속 목이 들어와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다. 목이 부족하면 목을 좋아하게 되지요. "
목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집착이다. 심지어 박사과정 논문도 책에 대해 쓰려고 계획중이다. 잠깐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내가 열광하는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의 몸이라는 것이다.
책의 표지의 미적인 요소에 금새 유혹당하고, 책을 손에 잡고서 느껴지는 두께감과 무게감을 즐기며, 종이의 가공과 종이의 질, 그 거칠고 보드라운 지면의 상태에 스며든 잉크의 번짐. 그러한 것들을 즐긴다. 몸은 사물이다. 그래픽이라기보다 제품이다. 어쩌면 종이 책은 시각디자인분야이면서 공예디자인이고, 제품디자인이다. 아름다운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하고 읽지 않고 쟁여둔다. 그러니 서점에 책을 아름답게 디스플레이하고서 (읽는것과는 무관하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책방주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인것이다.
오늘 아침 <시사인> 주간지를 읽다가 윤성근님(이상한나라의 헌책방 대표)이 쓴 <콘텐츠보다 소중한 추억의 아우라> 라는 칼럼을 만났다. 한손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초판을 구하는 이야기인데, 그 손님이 말하기를 친구가 오래전 학창시절 권해준 책을 읽지 못해 찾고 있는 것이며, 재판이 많이 나와 있지만 재판은 그때 그 친구가 권해준 책이 아니라서 그것은 그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책은 몸이 있어야만 그 의미가 완성된다. 나 또한 특정한 책을 떠올릴때 머릿속에 책장 어느열 책등은 무슨색 대략 이런두께 라는 몸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저자의 얼굴도, 책의 제목도 아니다. 책의 몸은 책의 내용만큼이나 우리에겐 의미있는 기호이다. 내용이 몸을 떠나면 그 내용은 이전(移轉)된 몸과 융합된 다른 기호가 되는 것이다. 마샬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언술을 떠올리게 된다. 실물로서 몸이라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시공간을 기록하고 있다. 반드시 역사를 가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실물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고 노쇠한다. 나의 책장에는 나와 함께 늙어간 시간적 동지들이 가득하다. 오래 된 책들을 들추면 곧바로 그 시간으로 이동하여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손님도 그시절의 초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만이 그 시절로 그를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그러한 아우라가 있다. 그게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