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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Sep 25. 2021

책배와 들뢰즈

책배를 즐기는 법

- 책배와 들뢰즈

나는 뛰어난 재주도 없고, 특출한 창의력도 없는, 학교만 주야장천 다닌 사람이다. 성격도 재능도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다. 무언가를 멋지게 해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 옆에서 ‘우와! 어떻게 저런 생각을! 멋지군’이라고 감탄하며 무리와 함께 손뼉 치는 부류다.


내가 속한 디자인 협회는 매년 전시하고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도록을 만든다. 어느 해는 도록을 받았는데 책배-책등이 아니고-에 멋진 그래픽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학창시절부터 두드러진 재능을 보이던 선배의 작업이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 시절 도록의 디자인은 특별한 아이디어랄 것 없이 그림과 작가 사진, 프로필만 조목조목 넣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런 도록의 배에 디자인을 넣다니! 세상 평범한 나로서는 생각도 못한 아이디어였다. 책이라는 몸을 단지 페이지의 연속으로 여겨온 내 생각의 고루함을 깨는 일이었다. 페이지면 만이 디자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책을 하나의 온전한 몸으로 인지하고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지금도 나는 책의 배를 비스듬히 넘겨 보는 것을 좋아한다. 숨어 있는 보물이라도 찾는 것처럼 배를 젖혀본다. 다양한 종이 덕분으로 리듬이 생긴 것도 있고, 사진이 도련 끝까지 물려 있어서 책배까지 드러나 하나의 인상을 만든 경우도 있다. 그것을 계산해서 사진을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우연의 결과도 재밌다.


최근에 책을 습관대로 젖혀 보다가 멋진 책배를 발견하였다. 페이지 면마다 드러나지 않게 색의 변화를 주어서 페이지 하나하나를 넘길 때는 무심히 지나치지만 다 모아서 전체 페이지의 배를 보게 되면 거기서 해가 뜨기 전 밝아오는 새벽의 하늘 같은 그레디언트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반복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항상 다른 경지에 이른다고 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철학자가 생각났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더라도 그것은 매번 다르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차이는 반복을 만들어 낸다. 들뢰즈의 사유까지 나를 데려간 디자이너-책배를 만들어준-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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