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타는 것이 보고 싶지 않아서
- 신간이 좋아
가끔 가족이 모두 집을 나가고 혼자 남게 된 할 일 없는 아침에 멍하니 홈쇼핑 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주부가 가장 좋아할 아침 8시에 나오는 호스트들이 프로다. 상냥하고 예쁜 호스트가 쉼 없이 말을 건넨다. 나는 TV에 모든 집중을 빼앗긴 채 눈 깜박이는 것도 잊는다. 평소 TV를 보지 않는 자에게 홈쇼핑은 너무 강력하다.
어느 날은 롯데홈쇼핑에서 재킷을 판매 중이었는데 호스트가 하는 말이
“제일 이쁜 옷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새 옷이지요.”
라는 것이었다. 오 누가 멘트를 썼는지! 가격에 관계없이 새 옷은 늘 매력적이다. 옷 뿐이랴 책도 마찬가지다. 신간이 제일 끌린다. 사람의 감각은 어찌나 해상도가 높은지 책방의 책들이 섞여 같은 테이블에 놓여 있어도 신간은 손님들이 귀신같이 알아본다. 금방 들어 온 책은 미세하게 다르다. 먼지와 손자국, 스크래치 하나 없는 표지는 새것의 폼이 난다. 빛에 반사되는 균질한 평면, 빈틈없이 밀착된 측면, 처음 펼칠 때 풍겨 나오는 인쇄 냄새. 새것은 반짝반짝하다. 코팅된 종이건 아니건 간에 반짝반짝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신간은 신간이다.
여러 사람을 지나고, 여러 날의 빛을 쬐고, 여러 날의 먼지가 쌓이고, 표지를 닦는 손이 스쳐 가고 나면, 더 이상 그런 반짝임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아무도 펴 보지 않은 책이라고 해도 ‘이제 더 이상 신간이 아니라오’라고 무언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누군가가 펴보고 가늠해 보느라 빛을 잃은 것이라면 다행인데, 펼쳐져 본 적조차 없는 책이 늙어 가는 건 주인장으로서 마음이 아픈 일이다. 예쁜 딸이 집안에서 늙어 가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비유가 다소 양성 평등에는 어긋나지만, 그런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책을 많이 들여놓지 않게 된다. 내 욕심으로 가져와서 못 팔리고 먼지 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다.
독립서점의 책들은 샘플북이 따로 있다. 샘플북이 없는 책들은 조심조심 봐주었으면 하고 주인장들은 소망한다. 소규모 책방에는 신간이라도 단 두 권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우리 서점도 그렇다. 손님이 보기 전에 들추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금세 늙어지고 마는 책을 보는 마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