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무늬
그 겨울 수채화-이종희
젖은 도화지의 끝자락,
위태로운 모서리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에게 젖어갔다
차라리 눈송이로 흩어질 것을
비도 눈도 아닌 시간을 데우느라
허공의 농도만 묽어지던 날이었다
혀끝에서 터진 색들은 발음되지 못한 채
우산 없는 빗줄기 속으로 투신해
서로의 윤곽을 뭉개뜨리고 있었다
잘못된 붓질임을 깨닫는 데에만
수십 번의 겨울을 통과해야 했다
마르지 않는 종이 위에서
외면과 포옹은 구분되지 않는다
통증은 붉게 번지고 사랑은 푸르게 고여
끝내 보라색 멍으로 남은 얼룩
종이 깊숙이 스며든 물감은
이제 분리될 수 없어
빛을 피해 자라는 설움으로 견딜 뿐
낯선 안부를 묻기엔 너무 늦었고
인연을 지우기엔 충분히 젖지 않아서
축축한 긴 오후의 물감 냄새만 자욱하다
덧칠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이 얼룩 또한
내가 그려낸 유일한 무늬인 것을
질척이는 종이 위를 가만가만 걸어가며
나는 세상에 단 한 폭뿐인 그림을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