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꽃들이 소란스럽게 피어나는 계절에도
외부 입력 차단 모드를 켜둔 너는
귀를 막기 위해 태어난 고성능 장치였다
한때는 상처를 거르는 필터라고 믿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방음벽이었다
오직 고집만이 유일한 재생 목록인 양
다정한 충고마저 삭제하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대화를 잡음이라 명명하며
정작 먼저 왜곡된 건 자신인 줄 모른 채
스스로 고립 전원을 켜고 말았다
관계의 습도가 높았던 날들을 견디지 못해
너는 자주 과열되어 오류 신호를 뿜었다
타협 없는 불통의 온도가 사람들을 밀어냈고
누군가 다가와 연결을 시도할 때마다
호환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엔 맞지 않는 사람들만
몰려 있는 줄로 착각했다
신호들이 하나둘 끊겨 나갈 때에도
너는 그것마저 너의 고고한 성능 때문이라고 했다
낙엽 지고 찬바람 귓가에 들이쳐서
너는 텅 빈 방의 정적을 감지했다
침묵 속에서 뒤늦게 확인한 건
너만 비행기 모드였다는 사실이었다
허둥지둥 차단막을 걷어내고
화해의 연결 버튼을 길게 눌렀다
푸른 불빛 깜빡이며 신호를 보냈으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너는 이미
연결이 거부된 장치,
한 번 삭제된 앱은 쉽게 깔리지 않았고
입력된 오류는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모든 연결이 실패로 돌아간 혹한의 거실
너는 이제 쓸모없어진 장치 흉내를 그만둔다
고장 난 기기라는 걸 인정하며
전파가 닿지 않는 구석으로 밀려나
입을 굳게 다문 화분 하나를 들여놓는다
암호도, 사과도 필요 없는 초록 잎사귀
몬스테라의 넓은 잎은 지난 과오를 묻지 않고
묵묵히 물관을 열어준다
사람의 말소리가 사라진 적막 속
너는 비로소 안도한다
대답 없는 식물의 흙냄새를 맡으며
이제야 덜 왜곡된 주파수로
천천히 동기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