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꽃

지나간 슬픔에 대하여

by 애린 이종희

성에꽃-이종희



밤새 적막이 써 내려간 기호를 읽는다


투명한 허공이

제 몸을 꺾어 만든 저 하얀 뼈마디들

부서지기 쉬운 절벽 위에

누군가 쏟고 간 고백이 엉겨 붙어 있다


기억은 늘 그런 식으로 도착한다

다 풍화되었다 믿었던 낡은 신음들이

계절의 모서리를 타고 돌아와

어느새 서늘한 무늬를 새겨 넣는다


손가락 끝으로 그 시린 파편을 만져본다

체온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문장들은

순한 눈물로 번져 흐르고

가려졌던 그늘이 조금씩 길을 낸다


보낸 마음은 어디에서 녹는 것일까

저 꽃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스며들지도 못한 채

오직 경계 위에 서서 제 몸을 반짝이는데


얼음이 다시 물이 되어 나를 씻어 내리는 시간

젖은 창 뒤에 고요히 멈춰 서면

비로소 너머의 볕이 굴절 없이 들어온다


지나간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깊게 닦아내고 지나가는 윤슬


마음의 시린 정적은 뒷걸음질이 아니라

다시 맑아지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간

따스하고도 투명한 얼룩이었음을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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