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2
고향의 봄은 다채로운 색채를 꿈꿉니다/이종희
친구네 다랑논 돌벽에 세워진 얼음 기둥이 떠나면 봄이다
돌담에 기대어 말라가던 볏짚 김발이 지쳐있으면 봄이다
흙이 꼼지락거리는 밭두렁에 신발 자국이 선명하면 봄이다
초록으로 우거진 청보리가 마음을 바람에게 포개면 봄이다
바구니 날개를 편 어린 소녀들이 참새처럼 짹짹거리면 봄이다
풀숲에 숨어있던 제비꽃이 불쑥 튀어나와 놀라게 하면 봄이다
붉은 꽃송이가 낭구밑으로 우두둑 내려앉아 소곤거리면 봄이다
포로로 롱 동박새 울음소리가 청아하게 가슴에 고이면 봄이다
햇살 받은 물그림자가 샘 안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면 봄이다
숲 속 우물가 개복성 나무 분홍 천사가 사랑을 고백하면 봄이다
우리 엄마 손가락에 점점이 박힌 밤생이 가시가 무뎌지면 봄이다
노란 동백꽃술이 소녀 볼에 살짝이 뽀뽀한 티를 내면 봄이다
허리 편 달롱기가 일어서려다가 아이들에게 들키면 봄이다
노을빛 물든 마당에 쑥국 냄새가 방울방울 피어오르면 봄이다
엄마가 데친 산나물이 대발 위에서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면 봄이다
친구네 개나리 울타리가 여객선을 향해 샛노랗게 손 흔들면 봄이다
동백꽃 화관을 머리에 쓴 소녀들이 낭구 밑에서 공주가 되면 봄이다
누런 묏동에 허리 굽은 자줏빛 할미가 한가롭게 앉아 있으면 봄이다
에메랄드 주단을 풀어놓고 바다가 유혹하기 시작하면 봄이다
제 색을 잃어가는 해초가 갯바위에 말라가는 줄 모르면 봄이다
누렁이와 할아버지가 서로 호흡하며 묵은 산밭의 혈관을 터주면 봄이다
우리 집 뒷골목 양지바른 텃밭 마늘 싹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봄이다
봄까치 꽃이랑 물구꽃이 들녘에서 사이좋게 땅따먹기 하면 봄이다
친구네 높다란 돌담 아래 숫돌 돌확에 물이 반쯤 찰랑이면 봄이다
빈 터 가장자리에서 개갓꽃이 무더기로 피어 사랑을 흘리면 봄이다
마당에 널린 빨래가 산들바람에 노곤하게 몸을 풀어헤치면 봄이다
이웃집 돌 화단 사철 푸른 목향나무가 시나브로 고개 들면 봄이다
지난가을 파리하게 말라 버린 국화 밑동이 싱그럽게 벙글면 봄이다
아랫마을 새랍 키 큰 돌배나무가 황홀한 꽃멀미를 유도하면 봄이다
돌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꿉놀이가 밖으로 나오면 봄이다
동백낭구 아래 비탈진 빈터에는 하얀 조가비 껍질이 많았습니다.
겨울을 건너는 사이 말라 부석 해진 덤불을 살짝만 들추어도 우리는 한살림을 차릴 수 있었지요. 운 좋게 대합 껍질이나 연청록 사금파리가 나오면 금세 부잣집 정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공돌 크기만 한 돌멩이를 주워 모아 아궁이와 부뚜막을 만들면 대합 껍질은 자동으로 가마솥이 됩니다.
솔잎 매단 솔가지를 부뚜막에 세워 놓으면 막걸리 식초가 되고, 아궁이 속에 잔가지 몇 개 쌓아 넣으면 장작불을 지필 수 있지요. 친구는 자기네 집 돌담처럼 높은 담을 만들려고 하지만, 저는 화단 가꾸기에 더 정성을 쏟습니다.
금방 떨어진 동백꽃은 버릴 게 없습니다. 꽃잎을 송송 썰어 다지면 고춧가루가 되고 꽃술은 노란 좁쌀을 섞은 밥이 됩니다. 빨래터 가는 길에 터를 늘린 돌나물, 미나리, 유채꽃은 식재료로 요긴하게 사용되고요. 운 좋게 나무판자가 있으면 밥상이 되지만, 없으면 널찍한 돌이면 충분합니다.
누가 더 보기 좋게 반찬을 만들고, 누가 더 정갈하게 요리를 담아내는지는 각자의 상상력이 정합니다. 친구는 항상 저보다 더 빨리 음식을 만들어놓고, 마치 어른들이 옆집 아낙을 부르듯이, 제가 만든 우리 집 돌멩이 울타리 위로 고개를 내밉니다.
"어이~꽃분이네~ 점심 먹으러 오소~
오늘 무시 짠지도 만들고 미나리도 무쳤네"
"만나겠네~ 나는 아까 갯것해온 *굴멩이 데쳐서
새콤달콤하게 무쳐 가겠네."
우리는 돌두레 밥상을 가운데 놓고 납작 돌을 하나씩 깔고 앉습니다.
개망초꽃이 피지 않아 아직 계란 프라이는 없지만, 진수성찬입니다. 도루코 연필 칼로 참 가지런하게도 잘라 무친 나물은 너무 예뻐서 젓가락으로 집어먹기가 아깝습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밥을 먹다가도 진짜 이렇게 예쁘고 푸짐한 밥상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벼운 탄식을 합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누군가 춥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바람 끝에 차가운 기운이 묻어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또 놀자며 일어나 손바닥으로 엉덩이와 다리에 묻은 먼지를 팡팡 소리가 나게 털어냅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내린 비가 연 사흘 동안 내렸습니다. 비 끝에 묻어온 바람이 약간의 찬 공기를 풀어놓는 바람에 빠끔살이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우리의 아까운 어린 시절을 떠나보냈습니다.
잊힌 줄도 모르게 가볍게 잊힌 인연이 있고, 그날이 마지막으로 악수한 날인 줄 모르고 무심히 흘러 보낸 날들이 있습니다.
모든 건 사람의 일이라 의지대로 살아갈 순 없지만, 아주 가끔은 풀잎을 돌방아에 넣고 찧어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보드라운 흙이랑 반죽해 풋 전을 부쳐보고 싶습니다. 정지 선반에 설거지한 꼬막 껍데기를 예쁘게 쌓아보고도 싶습니다.
자연이 제공한 재료가 전부였지만, 그 틀 안에서도 우리는 참 순수한 상상을 하며 자랐습니다. 이 투명한 봄날의 기억이 제 가슴에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으로 반짝이는 까닭입니다.
*빠끔살이-소꼽놀이
*정지-부엌
*낭구-나무
*갯것-해루질
*굴멩이-군소
*새랍-대문
*달롱기-달래
프롤로그 [섬마을 동화 ]
비렁길로 유명한 그곳은, 크고 작은 다양한 섬이 조화를 이루어 금오열도가 되었습니다. 그 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그 섬을 떠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지 깨닫습니다.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도 새랍(대문)만 나가면 가슴을 뻥 뚫어주던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 바다에서 불어오는 숱한 바람을 막아주던 돌담이 있었습니다. 그 안의 잔잔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스토리 詩를 접목한 섬마을 동화가 어떻게 밖으로 나올지 저 자신도 사뭇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