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4
그해 봄, 다시 피어났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2학년인 오빠에게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입학을 앞둔 저에게 숫자와 이름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빠는 엄마가 보내주신 깍두기공책 맨 위 칸에 제 이름을 연필로 꾹꾹 눌러 적었습니다. 오빠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소리 내어 읽어주면 따라 읽었고, 오빠가 쓰는 순서대로 써 보라고 하면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며 써 내려갔습니다.
예쁜 여자아이 두 명이 어깨동무하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진 자주색 가방과, 가느다란 빨간 허리띠가 달린 북청색 원피스, 그리고 하얀색 타이즈는 입학하는 날 입으라고 엄마가 보내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혼자 집에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가 집을 비운 날이면 저는 생애 처음 받은 가방을 메고 열 번도 넘게 학교 가는 산길을 오르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랫길과 윗길이 만나는 그 길에서 항상 멈추곤 했습니다.
숫자도, ㄱㄴ도, 제 이름도 이제는 안 보고 쓸 수 있을 정도로 글씨가 제법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그때, 제가 잘 모르는 분이 입학 통지서를 들고 왔습니다. 마침 새랍으로 들어오신 작은아버지께서 통지서를 펼쳐 보시다가, 그 작은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리고는 제 이름이 다르게 적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튿날, 산길을 넘어 학교와 출장소를 다녀오신 할아버지는 낙심한 표정으로 돌아오셔서, 출생신고할 때 이름이 잘못 올라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름을 따로 확인해 볼 필요가 없었던 탓에 어른들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했습니다. 내 나이 일곱이 되도록, 국민학교 입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까지 사람들이 무수히 부르고 불러주던 내 이름이 이제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금방 체념해야 하는 일에 익숙했던 저는 작은아버지가 불러준 대로, 오빠가 적어준 새 이름을 썼습니다.
“이종이.”
저는 '이종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앞뒤가 똑같아 금방 익혔습니다. 그래도 몇 번은 더 써보겠다고, 오빠가 하는 대로 연필심에 침을 발라가며 힘주어 눌러썼습니다. 며칠 후 잠시 들르신 작은아버지가 공책에 적힌 제 이름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이 종이라면, '백노지', '종이 떼기', 그런 종이를 말하는 거라고요.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만 다루는 작은 선반에서 사각으로 접힌 입학 통지서를 꺼내 펼치셨습니다. 그러고는 금방 껄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종이가 아니고 이종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풀잎에 내려앉은 이슬이 햇살에 반짝이고, 사방에 싱그러운 냄새가 가득 고여서 가슴이 콩닥거리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접은 행가치(행사용 스카프)를 옷핀으로 왼쪽 가슴에 고정시켜 주셨습니다.닫기고정시켜주셨습니다. 하얀 벽을 옆에 두고 병아리들이 앞으로 오류의심닫기나란히를 배우고, 차렷을 배우고, 열중셧을 배우고, 제자리걸음을 배웠습니다. 한데 모여 있던 아줌마들 틈에서 우리 엄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라 그런 것에 감정이 쏠리지는 않았습니다. 엄마가 샘가에서 부도 하늘에 핀 저녁놀을 보며 했던 약속, “내일모레글피면 데리러 올게”라는, 그 말이 사실이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기에는 학교생활이 너무 정신없었습니다.
봄이 가고, 누런 보리밭 너머로 뻐꾹새 소리가 다정하게 들려옵니다.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 지 50일이 지나도 저는 여전히 오빠의 걸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 걸음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갑자기 섬으로 내려온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여객선을 탑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던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학교로 저를 데려갑니다. 이제는 엄마 냄새를 찾아 킁킁거리지 않아도 되고,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제가 잘 모르는 또 다른 감정이 저를 자꾸만 따라다닙니다. 가슴 한쪽이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풍경이 흐려지기도 합니다. 교실 안의 새로운 친구들 얼굴에서 섬에 두고 온 친구들 얼굴이 보이고, 낯선 어른들 얼굴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입니다.
태어나 일곱 해 동안 늘 붙어 다녔던 이름이 느닷없이 사라지는 일만큼 모든 것이 혼란스럽지만, 일상은 새로운 사건을 끌고 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쪽같이 흘러갑니다.
*행가치-선수건 새랍-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