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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닮은 집

산문-7

by 이종희

달빛 닮은 집


살아생전 과묵하셨던 우리 엄마가 어쩌다 입을 열기라도 할라치면 눈물 콧물 쏙 빼게 하는 위트와 유머가 있었다. 지병이 너무 깊어 축 늘어져 계시면서도 엄마는 내가 옆에 눕기라도 할라치면 과거로 직행하는 블랙홀에 빠져서는 마치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주실 것처럼 엄마의 유년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셨다


엄마 심지에 굳건히 자리 잡던 외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외삼촌 가족이 모두 여수로 이사를 가시면서 외가는 우리 부모님께서 오랜만에 ‘내 집’이란 문패를 달 수 있었던 집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유년기를 들을 때마다 내 유년기와 맞물러 선명하고 실감 난 영상들이 펼쳐지곤 했다.


온 식구가 하나 되어 우리의 보금자리를 가꾸고 다듬던 시절이었다. 솜씨 좋은 아버지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널찍한 새 마루를 만드시고는 여러 날 페인트칠을 하시느라 슬레이트 지붕에 올라가 계셨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침 해가 제일 빨리 드는 돌담 가에 화단을 만들어 꽃씨를 뿌려두었다.


깊은 밤에 들려오는 산짐승 울음소리가 하나도 두렵지 않을 만큼 우리 집 마당에 달빛이 내려앉는 날이 많았고, 우리 집을 향해 뻗은 바다와 섬들이 모두 내 것인 양 가슴을 부풀게 했던 전망 좋은 돌담 가도 있었다.


직장 때문에 다시 해외로 떠나야 하는 막냇동생과 서러운 작별을 치르던 엄마가 간성혼수 중에도 애타게 찾으시던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보여주시던 온화한 미소가 모두 집결한 듯 너무도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어느덧 나와 동생이 만든 화단에는 엄마가 심어둔 앵두나무, 수국, 국화가 우리가 자란 만큼 무성해져 갔고, 화단에 뿌려둔 꽃씨가 이듬해부턴 마당 가득 꽃으로 피어나기도 했다.


그 마당은 풀이 자라기엔 척박했으나 그곳에서 피어나던 채송화 꽃은 그야말로 가을 공기처럼 맑고 순수했다. 그래서인지 채송화는 푸석한 듯 마른땅에서 아침 이슬이 실바람을 타고 서서히 말라갈 때 꽃 피우면 제일 예쁘고 고운 줄 지금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꽃들이 화단에 가득 차오르던 날부터였을까. 우리가 매일 가슴 시리게 보았던 노을이 수평선 끝까지 황금 주단을 풀던 무렵이었을까. 아니면 앞섬 너머로 밤배 등이 하나둘 깜박이던 어느 밤부터였을까. 너무도 평온한 일상들이 온 섬에 번지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우리 집 새랍 밖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시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고, 급기야는 그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날이 다가왔다.


매일 아침이 오고 다시 해가 뜨는 순리를 세상은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게 보통 분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시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서러운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좀 어떤가?"

"늘 그렇지... 뭐..."

"허어... 어찌까... 빨리 좋아져야 하는데..."

어느 날 평소 친분이 짙은 집배원 아저씨와 나눈 대화였는데

‘빨리 좋아져야 하는데...’ 그 말씀은 곧 좋아질 수도 있다는 말 같아

어린 가슴에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내 마음도 무색하게 거친 바닷길을 수없이 이겨내시던 아버지의 기름진 근육들은 나날이 무너져 내리고, 그 내림과 동시에 부풀던 아버지의 배가 더는 오르지 못할 때였을까. 두 동생이 조부모님을 모시러 아랫마을로 내달리던 그 어둡고 무서운 길 위에서 보았던 샛별처럼 아버지의 고통도 아스라이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여전히 내가 보았던 많은 것들은 건재해 있고, 내가 갈망했던 많은 것들은 서서히 순풍을 타고 있지만, 그 찬란한 시절에 내려앉은 슬픔의 조각들은 예고도 없이 수면 위로 떠올라 아직도 나를 무너뜨리곤 한다.


내 눈길 가는 곳마다 느닷없이 출몰하던 어두운 그림자를 다독여 멀리 보낼 수 있었던 뒤란에 숨은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줄 아직도 알 길이 없다.러나 우리 가족이 함께 만들던 울타리와 그 안에서의 가슴 따뜻한 날들은 시시때때로 무기력한 내 순수를 다독이곤 한다.


며칠 전 동창회 참석을 위해 여수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가 계신 봉두에 들렀다. 손 내밀면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어서 바람이 너무 잦으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도 있었는데 그날 엄마 계신 곳은 생각보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잊고 살면 내게 고인과 같고, 이미 고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동안에는 살아있는 사람이라' 했던가...


하지만 내가 엄마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자주 찾아뵙지 못한 마음에 준비한 조화 다발과 소주 한 병 그리고 새우깡 한 봉지가 전부였다.


그래도 엄마가 살다 가셨던 이 세상을 더는 서럽게 보지 않는다. 엄마의 무덤가에는 겨울바람을 묵묵히 이겨 내고 있는 영산홍이 있고, 나도 언젠가 그 꽃으로 이 세상 어딘가를 곱게 물들일 테니까...


2015.3


#새랍-대문(금오열도 방언)

여수시 남면 안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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