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한국에 들렀을 때 아빠한테 받아 온 씨로 가을밭에 배추를 심었는데 뜨겁게 덥다가 갑자기 선선해지는 테네시의 날씨 탓에, 또 나의 게으름 탓에 모종 심는 시기를 제때 맞추지 못해서 손바닥만 한 배추들을 겨울 내내 텃밭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주말 지나고 날이 풀리고 아몬드 나무에 꽃 도피는 걸 보니 봄이 왔구나 싶은데 뒷마당을 보니 배추에 어느새 노란 꽃대가 하나 둘 올라오는 걸 보고 오늘 아니면 이젠 못 먹겠다 싶어 씨 받을 한 포기만 남기고 몽땅 뽑아왔다. 실하게 자란 겨자 채도 한 포기 더해서.
집에서 텃밭작물로 음식을 해 먹으려면 씻고 다듬는 일이 반이다. 밭에서 뿌리를 잘라내며 깨끗이 다듬어 바구니에 담아도 집에 가져오더라도 또다시 일일이 흐르는 물에 헹구고 다듬어 줘야 한다. 다행히 꽃대가 올라온 녀석들도 아직은 손으로 뚝뚝 잘라질 만큼 연하고 야들야들하다. 밭에선 별로 많지 않다 싶었는데 씻고 다듬고 보니 바구니 두 개가 넘친다.
에헤라디야! 배추 잔치로구나.
배추 된장국에 겉절이를 해야겠다 싶은데 지난주 참기름이 똑 떨어진 걸 어쩌나.. 한인마트나 중국 마트까지 30분 운전 해 갔다 오면 되지만 열흘 후면 봄방학이라 애틀란타 가서 장을 보기로 했으니 되는대로 퓨전으로 트러플 오일 넣은 겉절이를 해야겠다.
이름 없는 잡종 요리도 창조적인 퓨전이라 생각하고 잘 먹어주는 남편이 있어 참 다행이다.
이젠 몸이 안 좋아 봄이 와도 농사를 못 지으실 아빠를 생각하며 야무지게 먹어봐야겠다. 아빠 살아있을 때 봤으니 이젠 혹시 돌아가시더라도 장례식 땐 못 올지 모른다고 서운해하지 말라는 모질고 현실적인 말을 던져놓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감사하게도 또 한 해가 지나가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지구 상에 남기기 위해 찬란한 꽃을 지우며 씨앗을 남긴다. 씨앗으로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또 열심히 살아 보자. 그것이 그저 우주상의 시간으론 그저 찰나라 할 지라도. 점이 이어 선이 되고 선이 이어져 또 면이 되듯 한 순간 한 순간을 그저 내 자리에서 잘 살아보자.
<양가 합일 배추 된장국>
1. 소고기 한 줌을 볶아 갈색이 될 무렵 듬성듬성 썰은 배추로 솥 하나를 가득 채운 다음 물을 솥의 손잡이 높이만큼 부어 쌘 불에 끓여준다.
2. 냉장고에 자리 잡고 있는 무나 양파가 있다면 그것도 썰어서 같이 넣어준다.
3. 물이 끓어오르면 다진 마늘 큰 한 스푼, 한국에서 시어머님이 보내주신 강원도식 막장과 시판 된장을 1:1 비율로 한 스푼씩 잘 개어서 넣고 시판 고추장도 1/3 스푼, 고춧가루 반 스푼을 넣고 배추색이 파릇파릇하던 게 검 녹색으로 푹 읽을 때까지, 무를 넣었다면 숟가락으로 건드리면 뚝뚝 끊어질 때까지 중불로 낮추고 푹 끓인다.
<배추 봄동 겉절이>
1. 듬성듬성 썰은 배추를 김치 통에 가득 채운다.
2. 멸치액젓 3스푼, 매실액 2스푼, 올리고당 1스푼, 고춧가루 1스푼, 다진 마늘 1스푼, 통깨 반 스푼, 트러플 오일 반 스푼을 넣는다.
3. 잎이 물러져 풋내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뒤집으며 잘 섞어준다.
맛 평가
이역만리 지구 반대편에서 아빠 사랑, 시어머니 사랑을 느끼며 목메는 맛. 우리에게 씨를 뿌려 남겨 주신 생명만큼 먹고 또 힘을 내 그분들 마음만큼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돌게 하는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