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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tuti Feb 01. 2020

내일부턴 출근을 안 합니다

은퇴한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시아버지께서 은퇴하셨다.


매년 연말에 우리가 언제까지 출근하실 거냐고 여쭤보면 "내년까지만 다니고 이젠 그만둬야지"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젠 정말 더 이상 출근을 안 하셔도 된다.

올해 75세이시니 한국의 평균 은퇴시기보다 한참을 더 일을 하신 거다. 3년 전 강북에서 작은 아들이 사는 곳 근처인 양주로 이사를 오시고선 새벽 5시에 일어나셔서 강남의 직장으로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파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괜찮다. 이것도 할만하니깐 하지." 하시며 고엽제 후유증으로 발병된 암 수술 후에도 척추 디스크 수술을 하신 몸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출근을 하셨다.


설, 추석이 되면 한국의 친구들은 미국 아줌마인 나를 부러워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어떻게 제사 명절 음식을 안 해도 되냐고. 그것도 맏며느리가 말이다. 그런데 더 부러워하는 건 물려줄 건 없더라도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걱정을 안 해도 되도록 본인 앞 가름을 잘해 놓으신 우리 시부모님이다. 명절과 제사야 종갓집이 아닌 이상 일 년에 고작 4번 정도지만 경제력이 없는 부모님을 모시는 건 매달 경제적으로 부담과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100세 시대를 마주하고도 IMF 이후 은퇴시기가 점점 빨라진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신의 부모님에게는 부모님 부양을 다 했고 자식들 교육과 시집 장가 뒷바라지는 다 했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보살핌을 바라는 것은 죄 약시 된 첫 번째 세대이다. 티브이를 보면 자식들한테 이것저것 바라는 부모들도 많던데 우리 시부모님은 제수비와 생신 때 보내드린 돈도 잘 받았다 하고 말씀하시고선 나중에 한국 방문 땐 그대로 모아 놓으셨다 이자까지 쳐서 도로 우리에게 이것저것 사 주시고 한국 왔을 때 쓰라고 생활비로 내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친정 부모님은 처음 결혼한다고 할 땐 시댁이 못 산다고 그렇게 결혼을 말리셨는데 이젠 시집을 잘 갔다고 너네 시부모님 만큼 양반이 없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신다.


은퇴하셨으니 이제 미국에 큰아들 내에 오셔서 좀 쉬시다 가시란 말에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있다 잘렸으니 실업급여를 받아야 한다며 나중에 생각해 보시겠단다. 실업급여도 그렇지만 아들 며느리네에 폐 끼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다.


결혼 초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 어머니라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 과학자, 장군, 혁명가, 학자, 정치가, 평화주의자, 예술인 등등... 그런 사람들을 다 놔두고 자신의 부모님이라니. 적어도 어릴 적 우리가 읽었던 위인전에 나온 또는 나올만한 사람을 존경해야 하지 않나? 난 우리 아빠 엄마를 그래... 어느 정도 존경은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위인전에 나온 사람들 만큼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명성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다. 우리 시부모님은 그런 우리 부모님에 비해서도 학력이고 경제력이고 사회적 지위도 다 떨어진다. 심지어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중학교 졸업장 밖에 없으시다. 돈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결혼 초기엔 사채 빚이 있어 그걸 갚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 알고 결혼했나?

남편에게 들은 어릴 적 이야기라곤 조부모님과 삼촌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정작 본인 가족은 돈이 없어 봉급이 나오면 십 오일은 밥에 김치, 나머지 십 오일은 밀가루 반죽으로 칼국수나 수제비를 해서 소금으로만 간을 맞춰서 먹고살았다는 이야기. 일곱 여덟 가구가 변소 하나를 나눠 써야 하는 달동네에서 살았어서 남자들은 아침이면 화장실을 쓰는 것 대신 길거리에 노상방뇨를 했다는 이야기. 그나마 월남전에 갔다 와서 받은 돈은 가족들이 다 써버렸단 이야기. 어느 한구석 성공하고 성취를 보여주신 아버지의 이야기는 없으면서도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결혼 후 아이 첫돌에 한국에 방문해서 처음으로 시댁을 찾아갔을 때 남편이 한국에 가기 전 "우리 집 작아. 너무 실망하지 마."하고 누누이 경고를 했으나 현실은 더더욱 거리감이 느껴졌다. 반지하 17평. 기생충에 나오는 딱 그런 집이었다. 아기가 아직 어리니 남들 다 같이 쓰는 더러운 호텔이나 여관에선 재울 수 없다며 굳이 집에서 며칠을 지내라고 하셨는데 내가 느끼기엔 호텔비나 여관비를 내 줄 여력이 없어서 그러신 것 같았다. 어린 아기를 이 사람 저 사람 왔다 갔다 하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일 수 없다고 퇴근하면 집에서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비행기에서 식사를 마지막으로 10시간도 넘게 굶고 기다렸는데 밥상엔 반찬이라곤 계란 프라이, 김치, 무와 소금만 넣고 끓인 국만 올라왔다. 그 마저도 너무 짜고 매워 넘길 수가 없었다. 도련님이 마침 군에 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도련님이 같이 있었더라면 다 같이 잘 자리도 모자랄 듯한 그곳에서 나는 아가씨 방을 부엌 옆 옷방 또는 창고라고 생각하고 가져온 가방들을 집어넣었고 내가 친정으로 떠날 때까지 아가씨는 불편하게 안방에서 같이 잠을 자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아가씨도 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저는 우리 엄마,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81년생 아가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와 싸우고 친구 엄마가 "너네 집 전화번호 뭐니? 너네 엄마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란 말에 "우리 집 전화번호 없어요." 하고 말을 했다가 억울하게도 거짓말을 한다고 더 야단을 맞았단다. 어릴 적 매운 김치 반찬 하나밖에 없어 꾀를 쓴다고 간장을 한 숟갈 넣어  밥을 비벼먹었더니 비싼 간장은 썼다고 매를 맞았단다. 시어머니께선 없는 집안 못 배운 부모 밑에 커서 애들이 버릇없단 소리를 들을까 봐 남들보다 더 엄하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키우려고 3남매에게 무섭게 매를 들어 가정교육을 하셨다.

시댁을 방문했을 땐 시부모님이 처음 구입했던 작은 티브이가 그대로 있었다.  경제적인 것만 보면 남편과 나는 6살 차이가 아니라 한 세대 이상 차이를 보여준다. 미국 유학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컴맹이었던 남편에게 처음 생긴 컴퓨터로 과제를 타이핑해서 제출해야 하는 일이었단다. 냉장고, 세탁기, 티브이 전기밥솥 같은 가전제품들도 남편에겐 중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집에 생긴 신문물이었다.  그래도 매일매일 밥을 해야 하니 매일 따뜻한 새 밥을 해서 가족을 먹였다고 자부하시는 우리 시어머니시다.


조선말에 부잣집 아들 딸로 커서 시집 장가 온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능력했고 우리 시아버지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을 해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시켜야 했다. 동생들은 놀고 술 마시길 좋아해서 일을 하지 않았고 동생들이 장가가서 애들을 낳고 사니 그 조카들까지 다 시아버지 몫이었다. 월남전에 갔다 와서 벌은 돈을 다 할아버지 사업 빚 갚는데 써 버리고 돈이 없어 둘째 아들을 큰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 보지도 못하고 가슴에 묻고는 강원도에선 더 이상 못 있겠다 싶어 서울로 상경을 했는데 가져온 밑천을 일 년도 안돼 사기꾼에게 홀라당 말아먹었단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셔도 고향에선 알코올 중독 동생들에 늙은 부모까지. 밑 빠진 독처럼 모아놓으면 홀라당 시댁에서 가져다 써 버리고.... 그렇게 다 챙기고 보면 당장 본인 자식은 챙겨주지 못해 여름엔 양말을 못 신고 학교를 갔단다. 비싼 옷을 못 입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고 깨끗한 옷을 안 입는 게 부끄러운 거라며 매일매일 깨끗하게 손빨래로 옷을 빨아 입히셨단다.

못 사는 사람들 동네에선  가겟집에 외상도 허다하고 이웃끼리 돈을 빌려주는 것도 흔한 일이라는 걸 시집을 오고서야 배웠다. 돈이 없으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다는 걸. 그나마 부잣집 운전기사를 하게 되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나 했는데 탄광에서 일할 때 다쳤던 허리가 도져 척추수술을 하셔서 일을 못하시고 몇 년을 보내게 됐다. IMF까지 터지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넉넉지 않았던 상황에서 대학생인 남편은 밤샘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생활비로 어머님께 드렸다고 한다.  그동안 북어포 뜯는 일, 마늘 까는 일 등 시어머니도 각종 부업을 마다하지 않으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시동생 가족들을 돌보아 왔었는데 정작 시아버지께서 아파 병원에 입원하시니 도움을 주는 친척은 하나도 없었다. 시장에서 반찬가게 하시던 시어머니께서 할머니께 잠시 병원 다녀오는 동안 만이라도 가게를 봐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가게를 봐주는 건 커녕 학교 다녀온 중학생  손녀에게 밥때가 늦었는데 밥을 안차려 받치느냐고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수술 이후 회복기도 지나기 전에 시아버지는 허리에 플라스틱 클러치를 차고 택시기사로 다시 먹고사는 일에 전념을 하셔야 했다. 일이 그나마 잘 풀려 내가 결혼할 때쯤엔 시어머니는 어린이집 식당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계약직으로 직장을 다니시고 꿋꿋이 삶을 버티며 하루하루를 사시고 계셨다.


시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애들 기죽지 않게 잘 키워라" 또는 "애들이 기죽지 않고 잘 큰걸 보니 니 덕이 크다." 하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쪼끔 한 애들이 기가 죽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시집와서 13년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다 보니 남편이 존경한다는 말의 뜻도 애들을 기죽지 않게 키우라는 말의 뜻도 알 것 같다. 한국의 역사를 앞장서서 쓴 위인전의 그들만이, 인물검색을 하면 이름이 나오는 그들만이  존경받을 사람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리에서 보릿고개를 보내고 새마을 운동을 하고 월남전에 참전하고 장사를 하고 남의 집 일을 하며 봉급으로 한 달을 버티고 비정규직으로 매년 재계약을 하고 살아간 그 모두가 한국의 역사를 같이 써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모두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남편은 사주에 자신이 자수성가형이라고 쓰여 있단다. 부모 덕이 없어서 혼자서 성공해야 하는 사람을 자수성가형이라고 한단다. 하지만 나는 근면 성실하고 양심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고, 두려움이 없고 진취적이고 낙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따뜻하고 배려심과 이해심이 깊은 남편이 이 모든 것을 부모님께 물려받을 걸 안다. 출장 중엔 꼬박꼬박 전화 해 안부를 물어 봐 주고, 퇴근 후 또는 주말엔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집안일을 척척 알아서 도와준다. 아이들과는 힘든 몸을 이끌고라도 일부러 함께 몸으로 놀아주고 출근길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며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십 대가 되어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준비한다. 이런 모든 모습은 우리 남편이 가정적이신 아버지를 보고 배우고 자란 결과다. 우리 남편은 부모 은덕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다.


등록금을 못 내서 남들 다 가진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십 대에 탄광에서부터 단 하루라도 일을 할 수 있는 날이면 출근 해 일해오신 아버지.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당신의 지나온 날 들이 아니라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기대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젠 가족들 걱정 그만 하시고 본인의 행복을 위해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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