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이다.
나에겐 만 스물 다섯이 되어 생긴 sister가 있다. 내가 언니지만 나이는 그쪽이 많아 정말 sister라는 말이 어울린다. 여형제 없이 자란 나에게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큰, 때론 언니같은, 또 여동생같은 그런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생긴거다.
Sister-in-law. 법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녀가 지난 9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귀국을 했다. 한동안 같이 살면서 서로 도움도 많이 주고 받으며 지냈었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니 마음 한쪽이 무거운 돌로 쟁여놓은 것 같이 답답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3월 말 뉴욕은 이미 코로나가 창궐 해 있었고 우린 어짜피 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 됐으니 우리집으로 내려와 지내라고 권유를 했다. 하지만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던 그녀는 학교 과제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다니던 식당이 닫은지도 오래.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학기 학비가 없는 상황. 숨만 쉬고 살아도 방 한칸 내 누울 자리를 유지하는 데만 한달 700불이 들었다. 뉴욕 봉쇠가 이루어 지기 몇일 전, 마침 아파트 계약이 만기가 되 이사를 준비하던 그녀에게 나는 대중교통은 구하기 힘드니 내가 운전해서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오겠다고까지 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보균자일 수 있어 우리 아이들에게 코로나를 옮길까봐 안되겠다고 극구 사양하며 뉴욕에서 버티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코로나에 걸렸다.
약국엔 이미 감기약 같은건 다 매진 된 이후. 한국에서 또 이곳 낙스빌에서 감기약과 먹을 것을 소포로 보냈다. 유학생이라 보험도 없었다. 새로 이사간 집 주인 할머니는 옆방에 기침소리가 나자 뉴저지 딸네집에 가서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위해 버티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너무 아파서 잠이 들수도 없었지만 잠이들면 혹시 다시 깨어나지 않을까봐 겁이나 깊은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약기운에 잠들고 살기위해 맛도 느낄 수 없는 뭔갈 찟어질 듯 아픈 목구멍 뒤로 넘기고 다시 약기운에 잠들기를 반복했다. 카톡을 해도 연락이 안되는 날이면 가족들은 혹시 무슨일이라도 일어났을까 하는 걱정에 온통 신경이 폰에 집중되 있었다.
유난히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온 것처럼 긴 코로나 투병이 끝났다. 학교는 다음 해에도 온라인수업만 한다고 발표를 했다. 학비는 한푼도 줄은게 없었다. 알고지낸 동생으로 부터 누구누구가 코로나로 죽었다고 흐느끼면서 우는 전화를 받았다. 한국뉴스에도 미국뉴스에도 이름석자 나오지 않는데 아무곳으로 부터 보호받지도 못하고 머릿수 하나하나가 돈으로만 여겨지는 유학생이란 것이 이런거구나 싶어 유학생활에 회의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못다 이룬 꿈이 있었다.
9년 전 그녀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고 있었지만 대학 때 전공을 살려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했다.
의상 디자이너의 문턱은 높았다. 유학을 갔다 오지 않거나 명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의류쪽 회사에 취직해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 했다. 의류회사에 취직을 한다해도 열정페이가 문제였다. 거기서 한달을 죽어라 일한데도 생활비를 충당하긴 힘들었다. 유명 의류회사 콘테스트에 출품한 작품이 체택되지 않아 자신은 재능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계절이 지나고 자신의 디자인이 그 회사 쇼윈도에 걸려있었다. 회사 전속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처음 오빠처럼 미국 유학을 와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싶다길레 유학을 할려면 돈과 영어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영어실력이 안되니 유학생각을 접으라고 직설적으로 충고를 해 줬다. 오빠는 돈 없이 유학 온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아냐며 남자도 아닌 그녀가 버티긴 힘들거라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살라고 했다. 하지만 2년 후 내가 둘째를 낳았던 그 해에 그녀는 지난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Be동사 변환도 제대로 못한체로 미국에 온 그녀는 어학연수에만 4년을 소비했다. 토플 점수가 나오지 않아 결국 4년제에서 목표를 낮춰 2년제 전문대를 입학하고 나니 또 다시 이번엔 수학이 문제였다.
수포자.
한국에선 인문계면 대학에선 수학은 하나도 듣지 않아도 되지만 미국에선 어느 과를 가던 기본 교양으로 수학, 영어, 과학, 역사나 정치를 들어야 한다. 결국 미국 유학 5년간 자신이 원했던 디자인공부와는 거리가 먼 영어와 수학공부만 하며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다 학비와 생활비로 날리고 식당일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다시 충당해야 했다.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다시 4년제로 편입학을 했다. FIT 같은 유명대를 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였다. 하지만 학비가 문제였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유학생에게 만 오천불이 넘는 학비는 넘사벽이였다. 그래도 본과에 들어가서 디자인 공부를 하게되자 하루하루 너무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스무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도 그들에게서도 배울 걸 찾았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모든 걸 멈춰버렸다.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의 거리에 차들이 없어졌다. 가게들이 다 문을 닫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나는 전설이다' 영화에서 처럼 텅 빈 공간만이 남았다.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지 점들만 남고 좌표평면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뉴노멀이란 그녀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그녀가 한국에 가기 전 한달을 오빠 집에서 보내라고 그녀를 우리집에 초대했다. 어릴적 어학연수를 하며 우리아이들을 키워줬기에 아이들은 고모와의 재회를 반겼다. 무척 야윈 몸을 보면 아버님 어머님이 속상해 하실까 매일 매일 파티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각종 음식들로 상을 채웠다. 근육이 쏙 빠져버린 그녀를 위해 오빠는 체력을 키워주기 위해 매일 저녁 함께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집을 떠나기 전날 밤 유투브를 틀어놓고 90년대 우리가 모두 어렸고 꿈 많고 고민이 많았던 그 시절 그 음악을 틀어놓고 광기어린 모습으로 소리치고 춤추며 노래방을 즐겼다. 아이들은 평소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 어른들의 모습에 어리둥절 했다. 그동안 쌓은 크레딧 카드 포인트를 모아 바꾼 1등석 비행기표. 그것이 새 인생을 시작하는 동생에게 주는 오빠의 마음이였다.
남들은 한국나이 마흔이 되도록 결혼도 안했고, 학위도 없이 유학생활을 끝냈고, 직장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는 우리 아가씨를 인생 낙오자라 생각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꿈이 있기에 그녀는 가난하지 않다. 꿈이 있기에 그녀는 항상 젊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