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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tuti Nov 24. 2020

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칠 자격이 없다

남 욕하지 말고 나와 그의 관계만을 바라보자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요'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야고보서 5:12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쌩둥 맞은 문장이 튀어나오곤 한다. 야고보서 5장을 읽고 있으면 앞에선 계속 기다림, 참을성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그 무엇보다 맹세를 하지 말란다. 


그러다 영어 성경을 읽은 어느 날, 두둥! 머리를 내리 치는 깨달음을 얻었다. 

Above all, my brothers and sisters, do not swear.... Otherwise you will be condemned.


Swear 란 단어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약속, 다른 하나는 욕(저주)하는 것이다. 


Vocaburary.com 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있다. 

(T)he word became on one hand sweren with the meaning "to promise, " while another version, swerian, became "to curse." Both might come from the idea of an oath being connected to a deity, but while one referred to truth, the other went to the dark side, negatively invoking a sacred name.

하나는 하나님의 진실이 담긴 약속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말하는 것 = 저주(욕)인 것이다. 


성경에선 하나님만이 상황에 구속되지 않은 완벽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 모두는 그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죄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를  실망시키는 이들을 참고 견디는 것에 복이 따르고 이웃과의 사이에서 그런 다툼이 있을 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한다. 하나님은 동정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과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아도 참고 기다려 주시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서로를 참지 못하고 기다려주지 못하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느냐 하는 뜻으로 읽는다면 앞의 내용에 하나도 어색할 것이 없다. 


가만히 욕을 바라보면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빌어먹을 X, 벼락 맞아 죽을 X, 썅 X.... 그 어떤 것들도 현재 그 욕을 먹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입에 담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그 사람의 삶을 예견하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욕이 아닐 테니 말이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있다. 내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면서 마치 알고 있는 양 상대방의 미래를 확정 지어 말하는 것이니 그게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가복음 5장 33절부턴 같은 내용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너의 머리를 걸고(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마라. 너는 너의 머리카락 한올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내 처지가 내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앞날을 내다보는 것처럼 그렇게 단호하게 맹세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도 나처럼 앞으로 어찌 될 줄 모르고 약속을 했을 텐데 그 약속을 저버린 것을 어찌 욕을 하고 그의 앞날에 저주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단호하고 확실한 건 단 하나도 없으니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아님 천당이나 지옥 따윈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없는지 어찌 안 단말인가? 


터미널이나 역전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시뻘건 십자가와 함께 몸에 치렁거리며 외치는 이들을 보면 예수를 믿지 않았던 나도 예수를 믿고 나서의 나도 기분이 나쁜 건 매 한 가지이다. "누가 천당에 가는지는 나도 아직 안 죽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법륜스님이 오히려 신뢰가 가는 것은 그가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당할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최근 혜민스님이 방송 출연으로 인해 세상의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무소유가 아닌 풀 소유를 하면서 무슨 깨달음을 얻냐고. 난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반문하고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 깨닮음이란 것이 무소유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소유하고 있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인가? 출가를 해야만 깨닫고 결혼을 하면 못하는 것인가? 조용한 외딴 산의 암자에서만 깨닫고 도시 안에선 못 깨닫는 것인가? 죄가 더 커야 은혜가 더해지지 않듯 소유가 줄어들어야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상대적 상실감을 주었단다.  내 손에 없었던 건 어제도 없었고 그제도 없었던 것이고 저 사람 손에 든 건 내손에서 빼앗아 움켜쥔 게 아닌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다 가진이가 어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냐고 우긴다. 그렇다면 모든 걸 다 가지신 하나님이 연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다 가졌던 왕자인 석가모니가 아무것도 없는 중생의 고통을 같이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었기에 그게 더 은혜로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모든 걸 내려놓았기에 우리가 사랑했을까? 그렇다면 그건 참 사랑이 아니라 남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건 아닐까?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강매하지도 않았고 한 권에 수십만 원씩 측정해 팔지도 않았다. 세금을 포탈하지도 않았고 그저 자기가 가진 달란트대로 말 잘하고, 인물 좋고, 글 잘 쓰는 그 달란트를 사용해 스스로의 종교 포교활동을 위해 스스로 그 자금을 마련했다. 신도들의 보시만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이 하고 싶은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왜 손가락질받아야 되는 일이란 말인가?  미국 교회의 목회자들을 보면 부목사나 작은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예배가 없는 낮이나 늦은 밤 시간에 파트타임으로 목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해 생계비를 번다. 또한 교회의 사모들이 거의 대부분 자신만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 교회에서 신도들을 통해 받는 수입만을 의존하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의 목회지도자들과 다른 점이다. 스님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얻은 부에 대해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


이미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나와 하나님이 온전히 연결돼 있는 그 찰나엔 다른 이에게 눈길을 주며 나와 그를 비교하는 여유란 없다. 그러니 잠시 내가 천국에 들어가 있다는 생각에 남에게 불신지옥을 외치고 손가락질하며 판단하는 순간 나 또한 다시 이 세상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는 것이니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그 형벌은 나에게 떨어짐이 틀림없다. 그래서 진정한 예수쟁이는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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